brunch

매거진 담우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우 Sep 11. 2020

철저히 소외당하는 순간

- 차이밍량의 <하류>



- 샤오강 (이강생 배우분)


[단평]

*브런치에 발행된 모든 글은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장 어둠이 내린다. 관객은 감각의 촉수를 곤두세운다. 일종의 준비자세이다. 앞으로 스크린에 상영될 영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의 감각을 만족시킬 것이다. 청각에 의해서든 시각에 의해서든 관객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자극을 선사 받을 터이다. 미디어 포화 시대의 어찌할 도리 없는 생태이다. 관객을 이끄는 것은 만족감만이 아니다. 관객은 이 시험대를 통과하여 자신이 그것을 감각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나는 숙제처럼 쌓인 필수 시청 리스트를 들여다볼 때마다 그곳에 인정욕구가 작용함을 부정할 수 없다. 아핏찻풍, 브레송, 타르코프스키……. 그 발음하기조차 힘든 이름들 앞에서 말이다. 나도 미디어 시대의 관객이다. 그래서 나는 <하류> 앞에서 당혹스럽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영화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     


  샤오강의 가족은 각자 삶의 저변이 다르다. 그들은 가족공동체라기보다 그저 집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어머니의 삶의 저변은 일터인 식당 엘리베이터와 내연남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게이 사우나를 매일 드나든다. 샤오강이 소유한 것은 낡은 오토바이 한 대이다. 그들은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있을 리 없다. 화제가 없으니 대화는 단절되고 소통은 영영 불가능한 것이 된다. 서로를 향한 말은 공기 중에서 휘발된다. 영화가 끝나기까지 아버지의 말에 대해 샤오강이 대답하는 순간은 단 두 번뿐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옆방에서 들려오는 안마기의 진동 소음과 같은 희미한 징후로만 확인한다. 그들은 서로를 계속해서 소외시키며 각자의 삶만을 영위한다.     


  <하류>의 이야기는 샤오강이 삶의 저변을 잃으며 진행된다. 그는 낙차 사고를 당한 후 혼자서는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물론 그는 어디론가 가야 할 목적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영화의 첫 씬에서 샤오강은 백화점에 무슨 일로 들렀냐는 동창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분명 샤오강을 어디론가 데려다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이 있다면 샤오강은 동창을 태워 줄 수 있고 그녀와 함께 호텔로 가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그는 이제 유일한 뗏목을 잃었다.


  그 사이, 밤에 폭우가 지나가고 아버지의 방 천장에 비가 새기 시작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물의 이미지에 주목한다. 물은 강과 바다의 경계, 소변, 폭우의 형태로 변형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카메라는 소변조차 롱 숏으로 비춘다. 물은 생의 근원이거나 모든 것의 가능태이다. 혹은 영화 속 모든 인물을 떠미는 힘이기도 하다. <하류>는 그 제목이 지목하듯 하나의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이다. 그곳에선 무엇도 다른 어떤 것보다 거대하거나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이야기가 파편이 되어 물살에 흘러 들어갈 뿐이다.     


  샤오강은 사고 후유증으로 목의 통증을 호소한다. 아버지는 그 통증을 해결해줄 곳을 찾는다. 샤오강의 통증은 현대의학과 한의학을 거쳐 결국 주술의 손에까지 맡겨진다. 그 과정 속에서도 샤오강과 아버지는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접촉하지 못한다. 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순간이라곤 샤오강이 오토바이를 운전할 때뿐이다. 그때에야 아버지는 손으로 아들의 부러진 목을 바로잡아 준다.     


  샤오강이 수술을 받으려 병원으로 갔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물론 그는 수술을 위해 삭발을 한 상태였지만 그의 외양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하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이 샤오강을 보지 못한 것은 이미 타자이기 때문이다. 단절의 고통 속에서 샤오강은 죽고 싶다고 외치며 자해를 한다. 아버지는 멀리 서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본다. 어머니는 잠시간 아들의 옆에서 위로하며 그를 말린다. 결국 그 잠시간의 드러난 균열마저도 그것을 치유할 계기가 되지 못한다. 어머니는 가족을 뒤로하고 자신의 저변인 엘리베이터로 도피한다. 균열은 다시 공공연히 은폐된다. 카메라는 이 인물들의 행동을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원경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샤오강과 아버지는 치료여행을 떠난다. 둘은 사원으로 가 주술치료를 받는다. 폭우가 내리고 밤이 찾아온다. <하류> 속 어둠은 모든 것을 익명으로 부치는 힘을 가졌다. 그 어둠 속에서 샤오강은 동창과 하룻밤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영화 속 소외된 개인들이 일말의 소통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둠 속이다. 샤오강은 밤 중에 게이 사우나를 찾아간다. 그는 미로 같은 사우나 속에서 헤매다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미로 속에서 샤오강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물줄기의 힘이다. 그것이 그를 그 방으로 떠민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없다. 그저 소외된 수컷 둘이 있을 뿐이다. 두 수컷은 서로를 애무한다. 샤오강은 아버지의 삶의 저변을 침범하는 것으로 가족으로 합류하거나 완전한 타인이 되고자 한다.    


  그때 물은 범람한다. 천장이 뚫려 물이 쏟아지며 어머니가 혼자 있는 집 바닥에 가득 들어찬다. 어머니는 폭우 속에서 발코니를 기어 올라가 범람의 원인을 목격한다.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것은 폭우 때문만이 아니었다. 윗집이 수도가 열어 놓은 채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윗집의 문을 아무리 두들겨봐야 주민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을 그토록 떠밀던 물은 대답을 얻어낼 수도, 원인을 짚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의 없이 흐를 뿐이다. 결국 사우나의 방에 빛이 들어오고 아버지는 자신과 사랑을 나눈 수컷이 아들이었음을 확인한다. 그 순간 아버지는 샤오강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영화의 어둠이 모든 행위를 익명 속에서 용인하는 것은 그다음 필연적으로 찾아올 빛이 그들을 벌거벗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수순은 물의 흐름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날 호텔로 돌아온 둘은 등을 맞대고 잠자리에 든다. 그때 카메라는 두 인물의 표정을 근경에서 바라본다. 그동안 카메라는 인물이 벌이는 광경을 멀리서 묵시하고만 있었다. 영화의 시선이 두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서 투시할 때 여태껏 배제되었던 목소리들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인물은 카메라의 정직성 앞에서 침묵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이들을 누구보다 많은 말을 건넸음을 깨달았다. <하류>의 물살은 우리가 외면해온 둑을 무너뜨리고 간격을 헤친다.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마주 앉은 표정과 대면하였을 때 그것이 자신과 똑 닮은 거울상임을 발견다. 카메라가 다만  인물들을 멀리서만 바라본 것은 이 이야기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관객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속내는 카메라가 비집고 들어가 단정 지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 영화의 위대함 앞에서 고백해야만 할 것이 있다. 이 영화는 끔찍하게 지루하다. 절제된 대사와 음악의 배제, 사건의 불연속성, 영화가 나를 이 지루함 속에 소외시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디어 포화 시대의 관객은 <하류>가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필름은 현시대에 들어서며 담는 것이 아니라 편집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많은 관객은 경제 논리에 의해, 작가의 의도에 의해, 더 많은 자극을 선사하기 위해 이리저리 편집된 필름에 익숙해져 버렸다. 물론 '그때'와 '지금'을 반대항 쯤의 위치에 놓고 노스텔지어적 수사를 붙이고자함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 스스로가 그런 관객이라는 보고다. 그런데도 내가 이와 같은 영화에 지독한 구애를 하는 이유는 정물화를 보는 감각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고흐의 <신발>을 골몰히 바라볼 때 어떤 인물화 작품에서보다 많은 목소리를 건네받지 않던가. 나는 묵묵히 순간을 담아낼 때 영화가 빚는 순수를 목격하였다. 그 순수는 어떤 거대한 서사보다도 깊은 울림을 준다. 다만 <하류>에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은 어느 순간에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 탓이다. 오히려 지루함에 매몰된 채 감상하였다. 그 탓에 번뜩이는 순간을 수많이 놓쳤을 것이다. 아마 극장의 어둠이 이 영화 앞에서 눈물 흘리도록 용인할 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찾을 것이다. 내가 외면했던 순간들을 포착하기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