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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축축한신발 Jul 11. 2022

꿈속에서조차 뛰놀기를 멈춘 이에게 흘려줄 눈물은 없다

영화 스픽 노 이블 스포일러 리뷰

스픽 노 이블(크리스티안 타프드럽, 2022)


추천/ 초식 동물, 비폭력적 중산층

비추/ 육식 동물, 메탈 같은 영화를 원한다면


표면적으로 문화권의 차이, 중산층의 선 또는 위선을 다룬다.


이 영화가 '호러'가 아니었다면, 보편적으로 볼 만하고 괜찮은 영화가 됐을 거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훌륭한 영화는 아니었을 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호러'고, 웰메이드는 아니다. 거의 모든 호러가 그렇듯이.

그렇지만 한국인에게 잘 먹힐지는 의문이다. 휴가 문화가 다르고, 한국에서 선호하는 호러 영화는 아니다. 점프 스케어가 없고, 쫓고 쫓기는 쫀쫀함은 보기 힘들다.


대신 영화는 시종일관 이건 불길한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손떨방이 전혀 없는 듯한 격한 흔들림을 안고 차량 한 대가 외진 시골길 세로선을 타고 오딘가로 향한다. 음산한 음악이 이 등장을 경고한다.

휴양지 리조트 수영장의 한가로운 한 때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어지지만, 현악기를 불안정한 불협화음이 계속된다.


다른 음악을 썼다면, 아니 음악이 없었더라도 토스카나에서 즐기는 즐거운 휴양으로 보였을 장면이다.

이 시작은 이 영화의 주제와 같다.


덴마크인 가족과 네덜란드인 가족.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살아왔으며 성격이 다른 이들이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한다고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다. 휴양지의 며칠이라면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둘은 동등한 상태니까.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공간에 초대한다면 어떨까? 두 번째 만남이니 더 흥겨운 상황이 펼쳐질까?


후회할 거라 짐작하면서도 초대에 불응하는 게 옳지 않다는 이유로 'yes'를  선택한 행동은, 현대인 대부분이 공감할 거다.


---이하 스포일러---

문제는 등장인물 귀에 들리지 않는 불길한 음악이다. 이 영화는 미묘하게 불쾌한 장면들을 쌓아간다.


종반 전까지 이 영화는 서사 상 불길하지 않다. 단지 짜증 나고 무례하고 공격적인, 비사회적인 사람들을 대면한 비욘과 루이사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호러영화와 가장 큰 차이다.


그렇지만 패트릭과 캐린은 매우 사회적인 행동인 '초대'를 통해 이들을 불러들였다.


비욘과 루이사는 '왜'를 묻지 않는다. 무례해 보이는 이들이 왜 자신들을 초대했는지 묻지 않는다. 그들의 자식을 거칠게 대할 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 또한 묻지 않는다. 고기를 권유했을 때 자신이 채식주의자라는 걸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얘기하지 않는다.


선의에 이유를 묻거나 타인의 자녀교육에 개입하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당히 방어적인 경향이지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은 아니다.


시작은 그랬다.

단계는 올라간다.


자식을 두고 외식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을 때, 따른다. 베이비시터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중년 남성에게 아이를 맡긴 채 불안한 마음으로 떠났다.


네덜란드어 메뉴를 몰라 비욘이 설명을 부탁하자 패트릭은 좋은 음식이라고 답한다. 구체적인 설명을 묻자, 추천한다며 자신이 알아서 시킨다고 얘기한다.


어떤 식당인지 묻지 않았던 그 식당은 레스토랑보다는 술집에 가까웠다. 아이가 올만한 곳이 아닌 그 식당에서 흥에 겨운 패트릭과 캐린을 끈적한 춤을 춘다. 비욘은 그들을 의식하고 몇 번 망설이다 루이사에게 춤을 제안한다.


살짝 흥이 오른 둘은 춤을 추러 일어서지만 신체 접촉은 없다. 점차 격해지는 패트릭과 캐린의 행동에 민망해진 둘은 자리로 돌아간다.


패트릭이 대접하고 싶다고 말해 방문한 식당이다. 그는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내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결국 민망한 비욘은 마지못해 결제한다.


돌아가는 차는 휘청이고, 음악 소리로 시끄럽다. 이때 처음으로 루이사가 패트릭에게 화를 내지만, 별 효과는 없다. 패트릭과 캐린은 루이사와 비욘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집에 돌아오고, 앙네스가 잘 자고 있다는 걸 확인한 부부는 안도한다. 이어 루이사는 담배 냄새를 씻어내러 샤워한다. 누군가-아마 패트릭- 화장실에 들어와 반투명 유리 뒤 변기에 소변을 보자 겁먹는다. 어떤 항의도 하지는 않는다.


침실로 돌아온 루이사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비욘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불쾌감을 씻어내려 비욘의 몸을 쓰다듬고, 키스하고, 관계를 가진다.


이때 밖에서 들리는 앙네스가 엄마를 부르는, 재워달라는 소리를 무시한다. 잘 배운 딸은 침실로 뛰어들지 않는다. 패트릭이 문의 반투명 유리창을 통해 침실 내부를 쳐다보자 비욘은 흠칫한다. 여성 상위 자세라 보지 못한 루이사에게 사실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마친 뒤, 루이사는 딸을 확인하러 내려가지만, 딸이 보이지 않는다. 딸은 패트릭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패트릭은 알몸이었다.


견디지 못한 루이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깨워 바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성공적으로 길을 나섰지만, 앙네스가 토끼 인형이 안 보인다고 말한다. 루이사는 새로 사주겠다고 말하고, 비욘은 갈등하다 유턴한다.


비욘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라 말하며 인형을 가지러 나간다. 그 뒤에 앙네스는 차 안에서 인형을 찾는다. 루이사는 비욘을 데리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말없이 가려했다는 사실에 패트릭과 캐린은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고 '왜'를 묻는다.


그 답변은 상식적인 이유였으나, 패트릭과 캐린은 마찬가지로 싫었으면 말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보편적인 반문을 한다.


서로 감정이 상할 말을 주고받은 이때, 패트릭은 오늘 일정은 자신 있다며 떠나지 않기를 요청한다. 루이사는 죄책감과 일련의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생각에 남기로 결정한다.


비욘은 패트릭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루이사는 캐린과 함께 정원을 정리한다. 휴가다운 시간이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춤 공연을 하고, 패트릭은 앙네스에 비해 많이 엉성한 아벨을 격하게 꾸짖는다. 비욘과 루이사가 말리지만, 결국 컵을 바닥에 던질 정도로 화랠 내는 패트릭.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앙네스는 겁을 먹고, 루이사는 항의한다. 사실 루이사는 자신의 딸보다 더 겁에 질린 상태다.


다음 날 돌아가기 위한 짐을 꾸리며 비욘이 앙네스와 루이사에게 말을 걸지만, 둘은 답하지 않는다. 아벨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항의는 했지만, 사과를 받지 못했다. 요구하지도 않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에 들지 못하던 비욘은 시끄러운 소리에 계단을 올라가 아무도 없는 거실 티브이를 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창고 같은 건물 불이 켜있자 호기심에 그곳으로 이동하고, 벽에 붙은 많은 사진을 목격한다.


거기에는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두 가족, 즉 네 어른과 두 아이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패트릭과 캐린 둘 만 모든 사진에 있었다, 아이는 바뀌고.


이런 사진은 영화 초반 부부가 엽서를 받았을 때 사진과 같은 구도, 형식이다.


겁에 질린 비욘은 자리를 떠나 돌아가던 중 그날 낮까지 자신이 맥주를 마시던 간이 풀에 익사한 아벨을 목격한다.


황급히 자리를 나섰지만, 기름이 떨어졌다. '놀랍게도' 비욘은 아내와 딸에게 이유를 전하지 않는다. '경이롭게도' 루이사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기름이 떨어져 비욘이 불빛이 보이는 멀리로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루이사는 패트릭에게 도움을 청했다.

헛걸음한 채 지친 몸으로 돌아온 비욘은 차에 가족이 없자 두려워하며 찾아 나서고, 패트릭과 함께 있는 둘을 마주한다.


겁에 질린 그는 영웅스러운 면모 없이, 그 차에 함께 오른다.

딸은 혀가 잘리고, 비욘과 루이사는 돌팔매질로 죽는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거라는 얘기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엔딩크레딧 뒤로 이탈리아 성당 프레스코 속 아기천사 회화가 있다.


이 영화는 4부 구성이다.


1부 이탈리아 휴향

2부 초대를 받고 방문하고 첫 번째 도망

3부 화해하고 다투고 사진 발견

4부 두 번째 도망과 재회


이탈리아에서 딸의 인형을 찾아줬다는 말에 패트릭은 비욘에게 Hero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선의로 행동하려 노력하는 중산층 가정은 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존재다.


이런 태도는 이기적인 마음과 공격성을 죽여나가는 학습을 통해 다다른 결과다.


두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도망을 제외하고 No를 외치지 않았다. 더 정확히, No로부터 도망쳤다.

비욘은 휴양을 갔을 때만 책을 읽는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대부분 지루해하는 휴양지 성악 공연을 볼 때 눈물이 고인다. 거짓 눈물일까? 그리고 극 중 눈물이 여러 번 날 뻔하지만, 끝내 눈 빆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그가 내보내는 건 침과 피뿐이다.


루이사는 옳음에 매몰돼 있다. 모든 영역에서 적당히 옳게 행동한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상징되는 적당한 올바름은 자주 깨진다.


선의를 거부하는 틀림과 육류를 먹지 않는 신념 사이 저울질하게 되고, 자식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던 모습과 달리 격한 감정에 이르자 앙네스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보인다.

둘은 가기 싫은 이유를 비행기를 자주 탔기 때문으로 둘러대지만, 배라는 더 불편한 선택지를 택하는 계기가 된다.


루이사와 비욘은 자식을 뺏기고 자신들이 죽을 상황에서 옷을 모두 벗으라는 요구에 순응했다. 순순히 죽었다.


1부의 평범하게 선한 사람, 2부의 불협화음, 3부에서 드러나는 위선까지는 에 영화가 호러로 느껴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미묘하게 기분 나쁘고 거슬리는 사건들일뿐이다.


사진을 발견하는 순간, 호흡이 아예 달라진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다.


디테일한 현실주의를 쌓아 올려 불만을 촉발할 것 같던 영화는, 그것들을 그대로 둔 채 신화로 빠져나간다.


앙네스는 혀가 잘려 말을 잃는다. 현자가 된 오이디푸스, 또는 수동적이기 그지없던 아벨이 떠오른다.


성격 속 아벨은 떠도는 존재다. 문명 성장의 토대가 된 농사를 지은 카인은 잔혹한 살인자다.


성경과 같이 또는 반대로, 돌팔매질로 사람을 죽인다. 무수한 사람이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됐을 거다.


두 악인은 사건 처리가 엉성하다. 사이코패스로 보기는 애매하다. 돌팔매질 후 두 사람은 서로 애틋하게 어깨를 감싼다. 신나 한다기보다는 의무를 수행하는 듯하다, 마치 진짜 악(evil)처럼.


우리는 가끔 순수악 같은 사람을 마주한다. 그 사람 같지 않은 존재를, 외면한다.


길거리에서 고성방가 하는 사람,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하는 사람, 술에 취한 채 여기저기 시비 거는 사람 등


인터넷이면 악플을 달고 목격했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 있지만, 그런 사회 안전망 밖으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폭력에 직면한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보호받을 수단이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현대인, 특히 성인, 특별히 지식인 중산층은 그런 상황을 마주할 일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드물게 있는 그 상황은 외면하는 게 좋다고 여길 거고, 반복할 거고, 내재화하고, 식물이 된다.


아이가 잘린 듯한 혀를 보여도 모른 척하고, 상대가 선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먹는다. 매사에 의기소침하고 부모에게 칭얼대지 않는 아벨의 태도에 관심 갖지 않는다.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머물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흐름에 몸을 던진 채 수십 년, 그렇게 식물 같은 존재가 됐다.


최후의 상황, 운전석으로 옮겨 도망칠 기회에도 행동하지 않는 무기력함. 현대인은 거대한 여러 문제 앞에 소소한 올바름 외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경험이 드물다.

감독과 공동각본 작가는 형제고, 덴마크인이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아이가 인향을 잃어버리면 찾기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이다.


이 영영화는 이런 이들이 악을 대면했을 때, 우리의 행동지침은 어떠해야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를 같이 고민할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 공격성을 잃은, 그게 옳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지녀야할 악 대체 행동지침. 최근 읽은 책들, 특히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 쪽에서는 한국인 관점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같은 방향성을 많이 제시했다. 가능?

+ 사막 여행자가 똑바로 걸어갔으나 돌아보니 비뚤었다는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엉성할 거고, 다른 이에겐 물속에 굴절된 물체처럼 느껴질 듯하다.


사진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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