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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세피나 Sep 19. 2024

여름방학(2) 아빠의 텃밭

고향집에서는 겨울이 되면 으레 텃밭에서 키운 고추로 빨갛게 갈아 만든 고춧가루와 하얗고 노란 속살이 가득한 배추를 키워 김장을 담갔다. 엄마의 작은 분식집에는 10가지 정도의 메뉴만이 존재하는데, 계절이 돌아오면 김밥에는 밭에서 따 온 오이가, 라면에는 대파가, 어떨 때는 빨간 쫄면 양념 위에 하얀 양배추가 잘게 썰려 들어갈 때도 있었다. 식탁에는 밭에서 딴 가지 무침이, 디저트로는 복수박이 매 식사마다 올라왔는데 모두 아빠의 텃밭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아빠의 텃밭에 심기는 작물들은 여러 가지이다. 철마다 조금씩 바뀌는데 대부분이 엄마의 요청에 의해 심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아빠가 유일하게 의지를 갖고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것은 고추다. 다른 작물들에 비해 가지런히 정렬되어 말쑥하게 자란 것만 보아도 그 정성을 알 수 있는데, 이번 여름 나의 큰 일은 이 밭에 있는 빨갛게 익어 따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고추를 따는 것이었다. 이 여름은 어찌나 식물들을 잘 살찌우는지 매일매일 새로운 고추 꽃이 피고, 열매가 점점 익어가 매일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새 오이와 가지와 애호박은 늙어가고, 초록 고추나무는 벌겋게 나를 따가시오 하고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아침저녁 드나들며 작물들의 상태를 살피고, 가게에 필요한 오이와 수박을 따고, 필요한 양만큼의 대파를 뽑아 왔다. 올여름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비가 오지 않았는데 고추 수확을 마친 어느 날 축축 쳐져가는 고추나무와 다른 작물들이 안쓰러웠는지 물을 끌어와 물을 주고선 다시 싱싱해진 작물들을 보고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표정으로 아빠는 뿌듯해했다. 


20대 후반 무렵 첫 직장을 고향에서 시작했다. 사회초년생으로서 겪은 사회생활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에서 좌절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정다운 가족이 아니었고, 아빠는 술기운을 빌려서야 잔소리든, 뭐든 할 수 있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둘이서 저녁 밥상에 앉았고, 이상하게도 나는 아빠에게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아빠에게도 꿈이 있다고 했다. 아빠의 꿈은 고추농사를 짓는 농부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늘어난 그가 책임져야 할 가족들을 위해 가고 싶었던 길을 포기했지만 아빠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고 했다. 그 길로 나는 마음먹은 대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날 이후 나의 여러 궤적에서 아빠는 나에게 별 다른 걸 해주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한 선택을 그저 지켜봐 주고, 명절이고 휴가에 지친 내가 고향에 돌아와도 별 다른 말을 덧붙여 괴롭게 하지 않았다. 뙤약볕에 지친 작물들이 안쓰러워 보일 때면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고, 다시 살아난 작물들을 보며 기뻐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우리는 어색한 부녀지간이고, 왜 특정해서 "고추"농사를 짓고 싶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으로 가득찬 아빠가 가꿔 온 텃밭을 보면 말하지 않는,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를 할 것만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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