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 성산동의 단골 카페를 찾았다. 망원동 한 서점에서 예술철학을 나누고 오후의 장소로 선택했다. 주인은 나를 모르지만(얼굴은 알겠지?) 나름 단골 카페다. 진한 커피에 브라우니를 곁들여 점심을 대신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카페는 대화의 공간이다. 당연히 손님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아는 사람일까. 아니다. 알긴 아는데 나만 아는 경우.
연예인이다!
어릴 적 일요일 저녁을 지배했던 유명 개그맨이자 MC. 이후 ‘속옷’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보란 듯이 재기한 사람. 강아지를 키우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젊었다. 그가 운영하는 평양냉면집은 나의 페이버릿 장소이기도 하다.
우중충한 나와 달리 스타일을 놓치지 않은 그는 직원인 듯 보이는 이에게 시종일관 방송과 비즈니스를 이야기했다. 누가 새로 시작한 방송 봤어? 어땠어? 그의 이야기는 부동산과 요식업 비즈니스로 옮겨갔다. 오랫동안 사업가로 다져진 내공 때문일까. ‘돈’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돈을 버는 사람은 늘 돈을 이야기하는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카페를 나설 무렵, 나는 어릴 적부터 팬이었다며 내가 읽고 있던 책을 펼쳐 사인을 요청했다. 알고 있다. 연예인의 사인을 받기에…… 내 나이는 적지 않다. 쪽팔린 일이다. 그러나 방송과 사업으로 단련된 그의 육성을 들은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비록 돈에 있어서 나는 그의 반대로 걸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잠시 후 그가 앉았던 자리에 세 남자가 착석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대화를 주도했고, 30대 남자 두 명은 그 대화를 추켜올리느라 바빴다. 그들의 대화는 곧장 ‘음악’으로 흘렀다. 뒤이어 누가 보아도 힙스터임에 분명한 30대 남자가 나타났다. 세 남자는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페이퍼를 테이블에 펼쳤다. 페이퍼에는 여자 아이돌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세 개의 의자를 사이에 둔 내 자리에서 보일 정도로 사진은 크고 진했다.
어느 소속사에서 나온 듯한 두 남자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스트리트 보드 패션을 한 작곡가 혹은 제작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아이돌의 성공 사례, 지금 유행하는 장르, 해외 아티스트의 노래, 춤, 패션이 논의되었다. 이렇게 신인 아이돌이 탄생하는구나. 흥미로웠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돌 소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루의 대부분을 노래와 춤 연습에 매진하는 동안 자신들의 콘셉트를 나이 먹은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으리라 여긴다. 이 시대에 아이돌을 하겠다는 것, 소속사에 들어가 풋풋한 청춘을 바치겠다는 것은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것일 테니까.
오래 가는 브랜드와 반짝이는 브랜드. 두 테이블의 대화에서 나는 세상의 관심을 끄는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을 엿들을 수 있었다. 어떤 트렌드도 영원할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라는 혹독한 영토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노장, 그 엄혹한 땅에 진입하기 위한 이름 없는 청춘의 희망 고문. 그 스토리텔링은 돈으로 시작되어 돈으로 마무리되었다. 본의 아니게 같은 자리에서 시차를 두고 흘러온 ‘돈’의 스토리텔링 앞에서 나는 조금은 위축되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과 비교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구석진 곳으로 유배를 자청한 나와는 다른 사람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굿 스타일’로 채워진 그들의 울트라 모더니티 앞에서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스포티하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스타일을 꿈꾸었던 젊은 날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중년의 편집자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