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본다. 중간에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흘러간 시간을 감지하는 습관이 있다.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 하루, 몇 시 몇 분에 잠자리에 드는 지 기억하기 위해서다. 물론 다음 날이면 쉬이 사라지는 사소한 기억이다. 그럼에도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나의 하루를 마감하는 소소한 리추얼이다.
어쩌면 두려움일 수도 있다. 나는 늘 잠자는 시간을 죽음과 연계시켜 생각한다. 수면내시경을 위해 마취하는 순간, 스르르…… 깨어보면 감쪽같이 사라진 시간. 우리는 매일 그렇게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간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존재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 시간을 확인하는 이유는. 마치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환자가 느끼는 불안감, 수술이 잘못 된다면,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같은 것일 테다. 이 당연한 잠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를 감안해 지금 의식이 깨어 있는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기억하는 것일 터이다.
시계 이야기를 하고 싶다. 1970년대 ‘국민학교’ 시절, 2층 주택이 곳곳에 지어지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매 시마다 뎅뎅뎅~ 시간을 알리던 벽시계. 아르누보 짝퉁 장식에, 어떤 집은 뻐꾸기가 튀어나와 시간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오리엔트’ 전자시계를 사주셨다. 손오공이 그려진 전자시계는 샤파 연필깎이(오뚜기 인형처럼 삼각형 모양의 샤파는 이후 검정색과 은색이 섞인 기차 모양의 하이샤파로 업그레이드되었다)와 더불어 신문물이었다. 어른들은 일본의 세이코 시계에 환장했고, 국산 브랜드는 오리엔트와 한독시계가 선전하고 있었다. 왕자표, 기차표 신발을 신던 국민학교 저학년은 고학년이 되면서 기차표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월드컵’ 신발로 갈아탔다. 간혹 운동화 옆에 신발 끈을 덧댄(도대체 왜?) ‘타이거’ 신발을 신은 아이도 있었고, 슈퍼카미트라는 신발을 신은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발 냄새를 없애준다는 새니타이즈드 공법으로 무장한 월드컵의 전성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이키’가 등장한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 이선희가 <J에게>로 <강변 가요제> 대상을 수상하고, 그해 가요계를 휩쓸 때 우리는 2교시 수업을 마치고 에어로빅 체조나 국악에서 따온 덩더쿵 체조를 하며 ‘누가 나이키를 신었느냐’에 관심을 집중했다. 나는 다행히(?) 학교에서 두 번째로 나이키를 신을 수 있었다(어머니, 고맙습니다!). 첫 주자는 6학년 3반 반장 이수경이었다. 연분홍에 빨간 사인이 그려진 그 애의 나이키를 생생히 기억한다. 집에 돌아가서 수경이의 나이키를 얘기했었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도 나이키를 신게 되었다. 월드컵은 당시 5천 원, 천으로 만든 나이키는 1만2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교부터는 ‘가죽’ 나이키 정도는 신어줘야 했다. 업그레이드다. 학교를 마치고 거울 앞에서 머리에 무스와 스프레이를 뿌리고 가슴에는 나이키, 아디다스가 새겨진 점퍼를 걸치고, 하얀색 가죽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운동화를 비쳐보는 게 남자 중학생의 하교 의식이었다. 물론 사춘기 남학생은 아무도 자기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모든 여학생이 나를 본다고 생각하는 불치병. 그 불치병은 죽을 때까지 낫지 않는다.
중학생이어도 ‘나쁜’ 대통령임을 알았던 전두환 ‘각하’는 이른바 ‘3S 정책’으로 국민들을 유혹했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탄생했다. 그 시절 우리는 정윤희, 원미경, 이미숙이 그토록 연기 잘하는 배우인 줄 몰랐다. 그들은 늘 벗고 나왔으니까. 그들은 늘 뻐꾸기처럼 온몸으로 울고 있었으니까.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시행되었다. 다행히 군인이나 죄수처럼 빡빡 머리를 밀지 않아도 되었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고, 머리를 기를 수 있게 된 중고등학생을 위해 자본주의는 맞춤형 상품을 준비해 두었다. 교복에 어울리던 검정색 중고생용 가방은 어깨에 걸치는 형형색색의 가방으로 변모했다. 나는 은색 나이키 가방을 선택했다. 하얀색 가죽 나이키에 어울렸으니까. 문제는 손오공이 시간을 깜빡깜빡 알려주던 오리엔트 전자시계였다. 유치했다. 은색 나이키 가방과 하얀색 가죽 나이키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파’라는 새 브랜드가 중학생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심지어 TV 광고도 했다. 젊은 선남선녀들이 떼로 나와서 외쳤다. K, A, P, P, A~
카파는 ‘삼성’이 만들었다. 교복 자율화에 맞춰 캐주얼한 카파 시계를 손목에 차고(지금의 ‘스와치’로 생각하면 된다), 남학생은 챌린저, 여학생은 뻬뻬로네, 그리고 봄가을에는 뉴망(New Man) 로고가 달린 옷을 입었다. 청바지는 뱅뱅, 써지오바렌테, 리바이스, 죠다쉬(죠다쉬는 반도패션, 지금의 LG가 만들었다) 정도는 입어줘야 했다. 고등학생 누나들은 죠다쉬 청치마에 살색 스타킹을 신고 ‘아놀드 파머’ 우산이나 ‘라코스테’ 악어가 새겨진 하얀 양말을 덧신었다. 그 정도는 입고 신어줘야 시내를 누빌 수 있었다. 그대여 그대여 울지 말아요~ 사랑은 사랑은 그런 거래요~ 이정희, 바람아 멈추어 다오~ 이지연,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원준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장혜진…… 누나들의 시대였다. 압권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온 강수지 누나였다. 물론 지금은 '불타는 청춘'이 되어버린 옛날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