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제작과 서비스 기획/운영에서 전면적인 디지털화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브랜드를 둘러싼 아이디어를 디지털 도구/플랫폼으로 공유하고 교류하지 않는 조직에 혁신은 요원하다. 당신의 브랜드에 아직도 디지털화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당신의 브랜드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소통하고 있는가. 프린트, 디지털, 공간, 인터랙티브, 모션, 환경 미디어, 머신러닝 등 여러 층위의 감각을 동원하는 트랜스미디어/크로스미디어 환경으로 바뀌었는가.
뉴욕의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디자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서 ‘시각예술'에 관한 칼럼을 쓰는 스티븐 헬러(Steven Heller)는 『기술과 디자인-디지털 세계의 양손잡이 디자이너』라는 책에서 지금의 그래픽 디자인은 그래픽적이라는 특징 조금, 디지털적이라는 특징 대부분, 그리고 과도기의 한복판에 있다며 그래픽 디자인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적었다.
그가 새롭게 정의한 디자인은 ‘다양한 플랫폼에 기반을 둔 미적, 창의적, 기술적 활동 및 전문 능력’으로 전통적인 아날로그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넘나드는 것이다. 이제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전유물을 넘어 기획자, 관리자, 생산자가 알아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통합적인 전문 분야가 되었다. 그래픽-타이포그래피-인쇄에서 정보 디자인-데이터 시각화-통합사고-경험 디자인-제품 디자인-인터랙션-브랜딩으로. 그동안 디자인 하위 장르의 생산도구 혹은 기술을 구성하던 영역이 디자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술 기자로 일하고, 디자인과 상호 작용하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책을 만들어온 지난 20여 년간 나에게 디자이너는 예술가와 동의어였다.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해온 이력을 인정받아 동양화의 현대적 해석을 구현하는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나는 시각예술 신(scene)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 ‘아티스트’들을 ‘미술가’로 참여시켰다. 1인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만나는 북 디자이너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도발에도 꿋꿋이 타이포그래피와 종이와 인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변화가 찾아왔다. 평소 좋아하던 디자인-브랜딩 기업에서 ‘읽기’에 관한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앱을 만들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철저히 ‘기술’ 분야와 연결되어 있다. 이날은 책, 이날은 기술, 이날은 시각예술……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세 가지 유형의 디자인을 모두 경험하며 협업하고 있다. 나야말로 과도기인 셈이다. 헬러 역시 같은 책에서 자신만의 ‘주제’를 정한 뒤 시장에 내놓을 만한 자신만의 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하는 일을 ‘디자인’이라고 총칭하고 있다. 창업하고, 앱을 디자인하고, 컨퍼런스를 기획하고, 작은 전시 공간을 열고,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지금 디자이너는 브랜드 마케터와 개발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존재가 되었다.
헬러의 제안처럼 지금 우리는 매일 매일이 ‘과도기(transitional)’인 시간을 살고 있다. 과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를 게 없다. 자신만의 고유한 제품과 스타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transition, 다른 상태-조건으로 기꺼이 이행해야 한다. 다른 상태-조건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한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