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날 사랑해주겠어요.
- 고(故) 박지선(희극인)
- 겉으로 보면 차가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다감하세요.
첫 책을 내고 (조금이라도 팔아보겠다고) 여기저기에서 북토크를 나눌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그동안 온라인으로 안부를 나눈 서점 관계자들도, 건조한 단문을 묵묵히 감내해준 독자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중년 남자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듯했다. 책으로 먹고사는 일만 신경 썼을 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돌아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겉으로 보면’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SNS에 투영된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다.
SNS에서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비칠까. 내가 ‘의도’한 대로 보일까, 예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무슨 상관? 당연한 얘기지만 삶은 SNS로 설명할 수 없다. SNS는 인생의 물음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흐른다. SNS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일 뿐이다. 물론 삶과의 간극이 터무니없이 크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SNS로 연출해도 나를 알고 있는 오프라인을 의식해야 하니까, 아무리 근사하게 연출해도 좁은 땅에서의 일상은 개긴도긴일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SNS 활용법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SNS로 나를 호소하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두리번거린다. 아니다. 다르지 않다. 타인에 대한 관심도, 타인을 향한 위로도 나를 보여주고 증명하고 확인하는 수단이다. 그럼에도 SNS를 ‘일반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은 대체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SNS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삶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사람, 인생의 ‘화양연화’를 SNS로 꾸미지 않는 사람을 이길 방도는 없다. 그저 리스펙!
아무튼 인생은 SNS로 파악할 수 없다. SNS는 일상의 조각에 지나지 않다. 그 조각의 크기가 ‘팔로워’나 ‘좋아요’에 연동될 뿐이다. 거대한 허상이다. 자존감에서 우러나오는 고급 유머를 선사해준 어느 희극인의 비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생은 비극이기도 하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슬픔의 비의』에서 “눈물이 반드시 뺨에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적었다.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 눈물은 말라버리기도 해서 깊은 슬픔 속에서 용기를 내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슴 속에서 흘러내린다는 문장이다. 저릿하다.
2020년 11월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생을 마감한 ‘그’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 슬픔에 끝은 있을까’라는 비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았을까. ‘괜찮아’라고 다독여도 서글픔이 밀려오지 않았을까. 우리만 괜찮다고 여겼을 뿐, 우리만 다르게 보았을 뿐,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미안하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속상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자로 우리 곁에 있어주지, 라는 뒤늦은 슬픔이 밀려온다. 슬픔의 비의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