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만화방은 재밌었지

12월 16일 화요일 아침

by 상구


어제는 바람이 추운데 시간이 잠시 비어 만화방을 들어갔다.


(1) 책을 골라야한다. 어려워!

나와 함께 만화방에 들어간 사람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선택지에 눈과 발이 바빠졌다. 나는 그 부산함을 한참 구경하다, 그 사람이 다 맛본 뒤 옆에 내려놓은 작품들을 뒤이어 읽었다. 만화라는 책에 있어서는 뚜렷한 호불호가 없는 나다. 많이 읽어본 사람에게는 어떤 게 특히 좋을테고 언제나 별로다 싶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세심함이 필요한 단계조차 못되는 나. 시간을 구매하는 공간에서 고민과 탐색은 사치다. 맛있는 작품만 발라내어 준다면 오히려 감사한 일. 든든한 가이드가 있었기에 당장 두 시간동안의 만화 여행은 걱정 없었다.


(2) 만화와 친하지 않은 아이

나는 만화방에 내는 연체비가 세상에서 제일 아깝고 억울하던 아이였다. 돈 주고 읽어봤자 부모님께 좋은 소리도 못 듣는 책. 숨어서 아껴 읽는데 대여 기간이 넉넉할리가 없고. 연체된 날 수 곱하기 하루 당 연체비를 계산기에 두드리실 때의 만화방 사장님들은 기분이 꽤 좋게 보였다. 내 게으름을 비용으로 지불해야하는 곳. 나의 일탈이 장려되는 공간. 연체비로 한 주 용돈의 대부분을 내야했던 어느 날부터 나는 만화방의 문을 열지 않게 되었다. 만화책과는 멀어졌고, 글쎄 성적에는 별 영향이 없었던 것 같고, 용돈은 다른 곳에 썼다.


(3) 만화를 알아가는 어른

만화책은 어쩐지 페이지가 휙휙 잘 넘어간다. 종이가 가벼워서일까. 글자가 몇 없어서일까. 종이 안에 검정이 빼곡한데도 후루룩. 누군가에겐 몇 달, 몇 년의 결과물일 무언가가 후루룩, 기름냄새 나는 얇은 종이에 담겨 넘어간다. 종일권을 끊으면 십 몇년에 걸쳐 연재됐다는 대작도 하루만에 훑어볼 수가 있겠어.

궁둥이 양 옆에 읽을 책, 읽은 책을 쌓아놓는 일이 재밌었다. 왼쪽은 바라보면 든든했고 오른쪽은 그 높이만큼 뿌듯했다. 자세가 불편하면 등을 대고 누웠다. 천장을 향해 팔을 쭉 펴고 읽어도, 책이 가벼워서 무리가 없었다. 얼굴에 떨어져도 그리 아프지 않겠고. 마침 눈부신 천장등을 책등으로 가려가며 열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짜파게티를 가지러 오라는 진동이 울렸다. 만화방은 좋구나.



마냥 싫었던 것의 좋음을 발견하고, 막연한 분야의 개론을 이해하고, 타인의 재미에 늦게나마 공감한다. 그럼 삶이 살짝 더 흥미로워진다. 읽다나온 만화의 다음 편이 궁금하다. 그 유약해보이는 인물은 대체 어떤 힘을 숨기고 있는건지 알고 싶다. 다음엔 김치볶음밥을 먹어보고도 싶다.



아무튼, 좋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