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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시대의 초상》,건설회관, (~2024.4.8)

전시 이야기

눈빛이 다 했다! 《강형구:시대의 초상》, 건설회관(건설공제조합), (2024.1.8~4.8)


입춘은 한참 전에 지났지만 요 근래 눈이 참 자주 내렸죠. 얼마 전 내린 눈은 10cm가 넘게  쌓였고, 금방 녹긴 했지만 어제도 분위기 있게 눈이 내렸고요. 여전히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가긴 하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29일까지 있는 2월, 마지막 주 월요일입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전시는 건설회관에서 진행 중인 강형구 화백의《시대의 초상》입니다. 전시 작품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요즘 보기 드문 거작巨作전이기도 하고, 이 시대 리빙 레전드의 작품이니 봐두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무엇보다 앞으로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어갈 건설회관 전시이기도 해서, 전시 공간은 좀 거칠고 어수선하지만 소개드립니다.

강형구 화백의 현재와 어린 시절 사진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초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강형구(1955-) 화백은 1980년 중앙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이후 전업 작가 대신 보통의 삶을 살아갑니다. 1학년 때 같은 대학 음대생과 연애를 시작해 사병 시절에 결혼했고, 아기가 생겼거든요. 당시 미술계에 대한 환멸도 있었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장의 삶을 선택하죠. 서울농약주식회사 기획실에 입사해 10년간 몸담았고, 퇴직금과 집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동숭동에 나우 갤러리도 운영했지만 근 4년 만에 접는 등 미술계로 돌아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더라고요. 마흔 가까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고, 2001년 예술의전당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전개합니다. 53세가 돼서야 첫 작품 판매가 성사되었는데, 상하이 아트페어에 나갔을 때로, 판매에 큰 기대가 없어 나무틀과 액자도 없이 캔버스를 둘둘 말아 갔다고 하죠.


지금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만 작가는 그때도 스스로를 "팔포(팔기를 포기한) 작가"라고 불렀더라고요. 강형구 화백은 그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동서양의 인물 초상화를 그립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아이콘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인 인물들이 느꼈을 감정을 화폭에 담기 위해,  그 표현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얼굴을 크게 확대해 캔버스에 극사실적인 방식으로 그리죠. 당시 우리나라에선 다른 사람의 얼굴을 집안에 들이기를 꺼리는 풍토 때문에 인물화 특히 초상화는 구매로 연결될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해요. 게다가 시장에서 판매되는 그림은 일정 크기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강형구 화백의 작품은 대개 200~300호 심지어 600호에 이르는 큰 캔버스에 그려져 이 역시 판매엔 큰 장애가 되었죠. 200호만 돼도, 세로 길이가 260cm 정도라, 일반 가정에 놓긴 부담스러우니까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결국 스스로 팔포 작가라 인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꿋꿋하게 해 나가며  이 모든 상황을 견뎌냅니다.


이전에 소개한 박미나 작가도 회화과를 졸업했는데, 당시 컬렉터 대부분이 "초상화(인물화)는 그리지 마라" , "크게 그리지 마라"와 같은 조언을 해줬다고 해요. 초상화가 영정사진 같고, 잡아먹힌다는 속설이 있어서 사람들이 집에 걸어두거나 소장하길 꺼린다고요. 여러 소장가들 사이에 퍼진 소장 금기 사항 같은 거였지만, 박미나 작가 역시 인물 초상화도, 큰 그림도 너무 그리고 싶어서, 그립니다 ㅎ (그 결과물은 현재 진행 중인 박미나와 44 전시에서 확인해 보세요). 1973년 생인 박미나 작가에게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온 컬렉션계의 금기는, 1955년 생인 강형구 화백 시대에는 더 무시무시한 괴담과 함께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겠죠. 지금이야 두 작가 모두 네임 밸류가 있어 초상화든 뭐든 그들의 그림이라면 뭐든 원하겠지만요.  

출처: https://www.christies.com/en/lot/lot-5002875, https://www.christies.com/en/lot/lot-5002874

그런 이유로 국내 판매가 미미할 때, 외국인 컬렉터들이 그의 가치를 올려줍니다.  2005년 시카고 아트페어에 첫 출품한 600호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상이 4500만 원에 팔리며 세계 미술시장에 각인됐고, 홍콩 크리스티 등에서 작품이 꾸준히 팔리면서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거든요. 외국 컬렉터들은 초상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고, 중화권에선 오히려 마오쩌둥이나 관우의 초상을 보러 인파가 몰렸고 자신들의 영웅이 사진처럼 재현될 것을 보고 뿌듯해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 경매사 누리집에 들어가 보면 2007년부터 2022년까지 팔린 31점의 작품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이 실 공간에 배치되었을 때 스케일도 보여주고요.

출처: https://www.christies.com/en/search?entry=hyung%20koo%20kang&page=1&sortby=date&tab=sold_lots

건설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형구: 시대의 초상》전은 앞서 얘기했지만 건설회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첫 번째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어요. 사무실 건물 구조 그대로 작품을 보여주는 오픈 갤러리 전시로, 솔직히 관람 환경이 좋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작품들이 크고 배경색도 강한 데다 몰입도가 깊어 주변에 휩쓸리진 않아요. 일단 건물 로비에 걸린 강형구 화백의 7m 대형 자화상을 보면, '잘 왔다'라는 생각이 들긴 하니까요.

전시 출품작 로비 입구에 걸린 <자화상> 사진촬영: 네버레스홀리다

그의 초상화는 강렬합니다. 불필요한 갖춤은 생략하고 오로지 얼굴만 집중적으로 묘사하는데, 강한 배경색보다 더 강한 눈빛이 시선을 잡아두죠. 작품도 크다 보니 조금만 높게 걸어도 눈빛에 제압당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요. 모든 묘사가 굉장히 정밀하고 세세한 데다 사실적이라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 화풍이라고 평하지만, 작가는 이에 반대하며 자신의 작품은 허구와 상상의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머리카락과 눈썹, 눈동자, 주름 등의 표현이 극사실적이라 기법적인 면에서 그렇게 말할 순 있으나, 그가 그리는 초상은 그가 접하지 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이기에 어느 정도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대상이 되는 인물의 과거 현재 미래, 감정, 표정 등 작가의 설정이 담기기에 완벽한 극사실은 아니라는 거죠. 실제로 오드리 헵번 초상에 윈스턴 처칠의 눈을 그려 넣기도 했고, 로비에 걸린 강형구 화백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투영되었고요. 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간달프, 살바도르 문디 등도 겹쳐 보였어요. 뭐, 일반인이 세세한 디테일을 다 잡아내긴 어렵지만요.

전시 출품작 사진촬영: 네버레스홀리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화면에서 붓 자국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물감을 분사시키는 기계인 '에어브러시'가 그의 주 도구로 사용되거든요. 물론, 에어브러시 외에도 붓, 못, 드릴, 면봉, 이쑤시개, 지우개 등이 활용되지만요.  캔버스가 아닌 알루미늄과 비단에도 그리지만 이번에는 캔버스 작품만 볼 수 있습니다.

출품작 사진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전시는 로비에서 시작해 복도, 1층 사무실, 2층 계단 앞 복도, 2층 복도로 연결됩니다. 마치 미술대학 실습실 같은 느낌을 주는 1층 사무실 공간엔 작품이 대부분 '기대져' 있습니다. '되게 디스플레이가 재밌네~'하며 들어서면 텅 빈 공간 벽면을 따라 작품이 놓여있고, 가장 안쪽에 소파가 놓인 휴게 공간 그리고 작업 공간이 있죠. 이 전시를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인데요, 이곳에서 화백님이 현장 작업을 하고 계세요 ㅎ

현장 작업실 사진촬영:네버레스홀리다

저 역시 우연히 화백님을 뵈었는데, 뵌 것에 그치지 않고 30여 분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관람객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신다며 앉았다 가라 시기에 앉았다 왔죠.  너무 의외의 만남이어서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이야기에 녹아들었다가 다른 방문객이 찾아오셔서 일어났어요. 덕분에 1년에 대략 25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보조를 쓰지 않고 혼자 작업한다와 같은 작업 얘기와 2026년 메릴린 먼로(1926~196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출품과 같은 해외 전시 계획과 손이 여자 손 같아 콤플렉스다와 같은 개인적인 얘기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작가로서의 다짐 섞인 말들까지, 아주 다양하게 나누고 왔어요. 이곳엔 완성작 외에도 빈 캔버스가 여럿 있는데 벽면에 세워둔 빈 캔버스에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진 쭉 이곳에서 작업하실 테니, 전시 기간 내에 가면 저처럼 화백님을 뵐 수 있을 겁니다.  

전시 출품작 사진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작품 중 눈을 제외하고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단연 머리카락과 눈썹 그리고 주름입니다. 특히 머리카락과 눈썹은 한 올 한 올이 정말 자연스러워서 만져보고 싶어지죠. 머리카락 묘사에 엄청 시간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 인터뷰를 보니 약간 허무하게도 맨 마지막에 전동 드릴로 알루미늄판을 마구 휘저어서 나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눈 감고 작업한다고.  

전시 출품작 사진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작품을 다 보고 나오는 길에도 작가님을 또 뵀습니다. 마지막 작품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여기서 사진 찍자" 하시더라고요. 돌아보니 작가님이셔서 기분 좋게 같이 사진을 찍고 나왔습니다. 굉장히 친근하시더라고요.


이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꼭 먼저 알아두셨으면 하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로, 바로바로 윤두서 자화상입니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자화상의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로, 작지만 몰입감은 엄청나요. 가끔씩 전시될 때가 있는데, 그땐 무조건 보러 가셔야 합니다. 동양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시하던 가치인 '전신사조傳神寫照'(인물의 형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내는 일. 또는 그 초상화 - 출처: 네이버 사전)를 보여주는 대표작이거든요. 설명할 게 많지만 언젠가 이에 관해 글을 쓸 일이 있을 듯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씁니다. 강형구 화백이 그린 윤두서 초상도 있으니 한번 찾아보시고요.

국보 <윤두서 자화상> 이미지 출처: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13602400000&p

오늘은 작가의 말로 마무리를 할게요.

"아직도 나는 '잘나가는 작가'보다는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는 작가'가 되기를 나 스스로 바란다"

그 마음 그대로, 마음이 이끄는 행복한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 가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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