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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기행> VS <밤의 석조전>, 내 취향은?

예술 이야기

창덕궁 <달빛기행> VS 덕수궁 <밤의 석조전>, 내 취향은?


하루만큼 자연물들의 색이 달라지고 있는, 가을입니다.


날씨가 변수이긴 하나 그래도 이맘땐 산이든, 강이든, 주변 공원이든 나들이하기 참 좋죠. 올해 10월은 앞선 달들에 비해 정말 스펙터클 하게 지냈는데, 그래도 바쁜 사이사이 유의미한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궁궐 야간 체험 프로그램인 덕수궁 <밤의 석조전>에도 다녀왔는데, 작년에 다녀온 창덕궁 <달빛기행>과 함께 소개해 드릴테니, 내년에는 꼭 두 곳 다 신청해서 다녀오세요. 만족도 최상 프로그램이거든요 둘 다.

© 네버레스홀리다

궁궐을 사랑하는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호불호가 없는 체험이 바로 창덕궁 <달빛기행>입니다. 이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된 창덕궁 <달빛기행>은 궁궐 야간 관람의 유행을 선도했죠. 올해로 14년째 운영 중인데도 여전히 인기가 많아서 당첨이 되는 건 '천운'이라 할 정도입니다. 저도 몇 년 동안 여러 번 시도했는데, 그땐 선착순 마감일 때라 동시에 접속해도 안되더라고요. 그러다 코로나 초기에 겨우 예매에 성공했는데, 그 당시 초기 대응 단계가 완전히 엄중해서 야외 활동이었음에도 일괄 취소를 당했어요. 관람이 가능했던 회차도 있었지만 제가 예약한 회차에 대해서는 어떤 후속 조치도 없었죠(진짜 원망 많이 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여러 번 도전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이후 가족권 추첨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작년 하반기에 재도전한 끝에  운 좋게 당첨돼 엄마와 다녀왔어요. 참고로, 현재는 예매권 추첨 방식으로 예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예매권 신청을 받고, 추첨으로 선택된 분들께 지정일에 예약 링크가 핸드폰으로 전송돼 오면  그 링크를 통해 예매하는 시스템이죠.


그렇게 여러 번 낙방 끝에 가게 되어 정말 설렜는데,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죠. 당시 북악산 근처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을 했고, 하필 그날 후원에 멧돼지가 돌아다니고 있어 안전상의 이유로 해당일 관람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거든요. 입장 10여 분 전에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으니 맥이 풀리더라고요. 그 허무함과 상실감을 한 시간 반에 걸쳐 집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일단 해소는 했지만, 재관람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기에 진짜 우울했어요. 사실 그 체험은 엄마께 드리는 생일 이벤트 중 하나였거든요,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어쨌든 운영진 측에서 시즌이 끝나기 전에 다시 관람할 수 있도록 특별 회차를 마련해 줘서 잘 보고 왔습니다.   


<달빛기행>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부근에서  입장 15분 전부터 본인 확인을 진행합니다. 확인을 마치면 돈화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열에 서서 돈화문이 열리길 기다리죠. 기다리는 동안 나각수의 신호로 수문장들의 행렬이 짧게 진행되고, 정시에 문이 열리면서 담당 해설사가 나타나면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됩니다.

창덕궁 <달빛기행> 수문장 행렬©네버레스홀리다

회차당 한 개 조에 25명씩 2개 조(50명)가 5분 간격으로 입장하는데, 돈화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면 2인당 한 개씩 청사초롱을 나눠줘요.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어 사용이 편한, 현대식 청사초롱입니다. 프로그램은 조별로 전문 해설사와 함께 돈화문 → 진선문 → 인정전 → 희정당 → 낙선재 → 상량정 → 부용지→ 애련정과 애련지 → 연경당(공연) → 후원 숲길 → 돈화문의 순서로 약 100분간 관람이 이뤄집니다. 사실, 별거 아닌 듯해도 소수의 인원이 전문 해설사의 안내로 넓고 고요한 고궁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경험은 꽤 특별합니다. 도심의 현란한 불빛에서 멀어져 우리 역사를 되새기는 동안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낮의 복잡함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어 문화재에 더 집중하게 되고, 낮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적절하게 가려주는 어둠이 있어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요.

창덕궁 인정전 ©네버레스홀리다

낮의 고궁을 관람할 땐 기와나 장식, 단청 색상에 집중하게 되는 반면, 밤에는 조명에 의지해 전반적인 전각의 형태와 전통 창문살, 내부 구조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궁궐은 왕의 거처인 만큼 건축물과 장식에 좋은 의미가 가득한데, 낮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던 길상의 의미를 담은 다채로운 문양의 창문살의 형태가 밤이 되면 확연히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요.

창덕궁 낙선재©네버레스홀리다

 <달빛기행>에선 특정 장소에서 특화된 전통예술 공연과 프로그램을 관람 및 체험하게 됩니다. 몇몇 미개방 지역도 돌아볼 수 있고요. 가령, 전각 지역에선 희정당 외현관이 개방되었고, 낙선재 후원에 우뚝 선 육각형 누각인 상량정은 낮엔 관람이 불가한 지역인데 대금 연주를 들으며 서울 시내를 조망했고. 후원 부용지 근처의 영화당에선 거문고 공연을, 연경당에선 효명세자를 주제로 한 전통예술 공연을 감상했어요. 연경당 공연은 15분 내외로 구성되었는데 이땐 음료도 제공되어 갈증도 해소됐죠.

달빛기행에서 만나게 되는 전통 공연들©네버레스홀리다

이 밖에도 부용지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인 '왕가의 산책'이 진행되었는데,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마주하는 시간인 ‘왕가의 산책’은 관람객들이 조선의 왕과 왕비와 함께 사진을 찍는 프로그램입니다.

창덕궁 후원 외©네버레스홀리다

예전에도 쓴 적 있지만, 서울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섯 개의 궁 중 저는 창덕궁을 가장 좋아합니다. 1395년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부터,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모두 왕조 시대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이자 휴식 장소가 되어주고 있지만, 산세와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전각 배치와 다른 궁에 비해서 더 깊은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창덕궁은, 갈 때마다 정겹더라고요. 사계절 언제 가도 멋있고요. 웅장함은 경복궁을 따르기 어려우나 거긴 뭔가 각 잡힌 '궁궐' 같고, 창덕궁은 푸근한 '집' 같달까요. 그런 이유로 역대 왕들도 가장 오래, 자주, 많이 창덕궁에 머물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요.  


관람을 마친 참가자들에게는 기념품이 제공되는데, 하반기 기념품은 창덕궁 에코백이었어요. 품질도 좋고 크기도 적당해 꽤 쓸모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입장료가 1인당 3만 원인데,  에코백(기념품)에, 음료수에, 공연, 창덕궁 입장료, 해설이 포함된 것이니, 전혀 비싸지 않죠. 무엇보다 밤의 고궁에서 느낀 고즈넉함과 일상의 특별한 휴식을 경험해 보니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니, 왜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선호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창덕궁 <달빛기행>©네버레스홀리다

덕수궁에서 진행되는 <밤의 석조전>은, 창덕궁 <달빛기행>이나 경복궁 <별빛야행>과는 또 다른 멋과 맛을 선사하는 궁궐 야간 관람프로그램입니다. 앞서 두 곳이 조선시대 왕궁을 배경으로 당시 문화를 전통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덕수궁 <밤의 석조전>은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체험을 현대적 방식으로 전달하는 게 큰 차별점이죠.


<밤의 석조전>은 아직 생소한 분이 많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2021년 시범 사업 후 반응이 좋아 2022년 정식 개최되었고, 올해 상·하반기 연 2회로 회차가 늘었어요. 현재 대부분의 궁 야간 체험 행사는 신청자가 많아 사전 추첨제로 예매가 진행되는데, 만 65세 이상 및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회차 별 선착순으로 1인 2매까지 전화로 선착순 예매가 가능합니다.  어쨌든 저도 사전 접수를 하긴 했지만 사실될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다행히 예매권에 당첨되어 송부된 예약 링크를 통해 2인(1인 26,000원)의 체험비를 지불하고 실 예약을 마무리했죠. 10월 6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되는 이 행사는 오후 6시 20분, 6시 50분, 7시 25분 일 3회 전문 해설사와 함께 석조전 야간 전시 및 역사 해설, 석조전 테라스에서 클래식과 차와 간식을 즐기는 테라스 카페 체험, 접견실에서 창작 뮤지컬 ‘고종-대한의 꿈’을 감상하는 90분 일정으로 구성됐어요. 행사 당일 집결 장소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예약 상황과 신분증을 확인한 후 순검을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가 수신기를 받으며 2차 예약 확인까지 마치면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덕수궁 <밤의 석조전>©네버레스홀리다

관람객들은 상궁을 따라 광명문을 통과해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 중층 건물인 석어당, 1897 고종의 경운궁 환궁 후 정전으로 사용한 즉조당과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이용된 준명당을 거쳐 석조전 앞에 이르는데, 건축물만 스쳐가는 게 아니라 꼭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사진 찍을 시간도 줘서 기초 지식 없이도 건축물의 의미와 쓰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궁이 안내하는 전통 전각들©네버레스홀리다

석조전 앞에선 대한제국 총관이 관람객을 맞아줍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환영해 주는 총관과 순검을 따라 석조전 계단을 오른 후 열린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개화기 복식을 갖춘 전문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죠. 관람객들은 수신기를 통해 해설을 들으며 석조전 1층, 2층에 있는 황제의 생활공간을 둘러보는데, 정해진 프로그램들이 있어 낮에 진행하는 전문 해설만큼 긴 시간이 할애되진 않았지만, 밤에 들으니 같은 내용이라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석조전 내부 ©네버레스홀리다

해설 중반쯤 찾아온 휴식시간은 더 특별했어요. 휴식시간 역시 프로그램의 하나로, 이 시간엔 석조전 테라스에서 눈으로는 덕수궁의 야경을 보고, 귀로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가배차와 서양식 후식(까눌레와 휘낭시에)을 맛보는 ‘테라스 카페 체험’이 진행됐거든요. 가배차(咖啡茶)는 당시 커피의 영어 발음에서 따온 말로 ‘가배차’ ,‘가비차’, ‘양탕국’으로도 불렸는데, 당일 예쁜 찻잔에 제공된 커피는 후식과 잘 어우러져 참여자들의 입을 즐겁게 했죠. 또 커피를 못 마시는 관람객들을 위해 새콤달콤한 상심자차(桑椹子茶, 오디)도 준비되었는데, 쌀쌀한 날씨에 달짝지근한 풍미가 부담스럽지 않게 입안을 가득 채워, ‘한 잔 더’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옷을 잘 챙겨 입고 왔지만, 혹시나 추위를 느끼는 관람객들을 위해 무릎 담요와 핫팩도 구비되어 편안하게 즐겼고요.

석조전 테라스©네버레스홀리다

차를 마신 후엔 다시 전문 해설사의 내부 해설이 이어집니다. 2층에서 1층으로 이동하며 나머지 공간들을 둘러봤고, 마지막 장소인 접견실에서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창작 뮤지컬 <고종-대한의 꿈>의 대표 넘버 3곡을 1열에서 관람했죠. 극 중 고종과 명성황후로 분한 두 배우가 등장해 부르는 <다시 품은 꿈>, <안부>, <대한의 꿈> 3곡은 석조전이 완공되었지만 망국의 길로 접어든 나라를 보며 느낀 무력함과 좌절감, 명성황후에 대한 그리움, 대한의 이름으로 다시 역사를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는 고종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곡이었는데, 석조전에서 들으니 그 내용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며 감동도 배가 되었어요.

석조전 접견실©네버레스홀리다

공연까지 보고 나면 공식 행사는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체험은 계속되죠. 우선 수신기를 반납하면서 커피 티백이 든 기념품을 받았고, 그 바로 옆에는 개화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소품들이 준비되어 이를 활용해 추억 사진도 남길 수 있었어요. 인생 두 컷 사진 체험도 진행되었는데, 현상 사진뿐만 아니라 핸드폰으로도 원본 파일도 보내줘서 얻는 게 쏠쏠하죠. 유료 프로그램이지만 그 이상으로 얻을 수 있는 문화체험들이 많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밤의 석조전>체험 및 기념품©네버레스홀리다

<밤의 석조전>이 끝난 후에도 덕수궁 야간 관람은 지속됩니다. 물론 개별적으로요. 덕수궁은 휴궁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개방 중이라 관람이 가능하거든요. 꼭 프로그램 참여가 아니더라도  덕수궁 매표 마감시간인 오후 8시까지만 입장하면 한 시간 동안 여유롭게 궁을 돌아볼 수 있는데, 관람료도 1,000원으로 저렴해 가을밤 차 한 잔 들고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도, 좋아하는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에도 조용하고 좋습니다.


물론 내부 공간을 두루 둘러볼 순 없지만 조명이 멋들어져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고, 야간에 봐도 건축물의 아우라가 줄어들지 않아 더 좋아요. 게다가 최근에 고종의 즉위 40주년(1902년) 기념 칭경 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한 건물인 돈덕전(惇德殿)이 복원, 개방되어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고요. 낮에만 내부 관람이 가능한 관계로 저녁엔 외관만 봐야 하지만, 조명이 비쳐주는 돈덕전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낮과 밤의 돈덕전©네버레스홀리다

정관헌 역시 밤에 봐도 예쁜 궁궐 내 전각입니다.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팔작지붕에 서양식의 차양칸과 난간이 있고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언제 봐도 새롭고 멋있다. 정관헌에서는 명사초청 강연이나 공연 등이 종종 진행되는데, 관련 행사 정보는 덕수궁 누리집을 참고하세요.

밤의 정관헌©네버레스홀리다

고궁의 밤은 낮과 다릅니다. 가을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더 깊은 가을이 오기 전에, 그 예쁨과 고아한 분위기를 꼭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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