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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 마이아트뮤지엄

전시 이야기

《일리야 밀스타인 Iiya Milstein: 기억의 캐비닛》, 마이아트뮤지엄, 2023.9.20~2024.03.03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날 때 문득, 이 전시 소개를 빨리 쓰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 개막을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작품을 보고 나니 더 행복해지기도 했고, 예쁘고 멋있는 걸 본 후에  "이거 봤어요~"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심리도 깔려있고요 ㅎ '절대'라는 단어를 잘 쓰진 않지만, 이 전시는 절대로 ‘불호’가 있을 수 없으니, 제 글로 전시장 분위기 살짝 읽어보시고 곧 있을 추석 연휴에 여가 활동으로 고려해 보세요.

전시 배너 사진 : 네버레스홀리다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Ilya Alexander Milstein, 1990)은, 사실 제겐 아직은 낯선 작가입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그것도 작품이 아닌 아트 굿즈로 처음 접했는데 그 이미지가  눈과 마음에 들어 제대로 보고 싶단 바람이 있었죠.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중인데 생각보다 빨리 전시회 소식이 들려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얼리버드로 일찌감치 티켓을 구매해 뒀고, 비가 나름 많이 내렸던 개막일 늦은 오후에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비가 오네요~


그는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지만, 원래 밀라노에서 태어나 멜버른에서 자랐고, 멜버른 대학교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어요.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 후 American Illustration and Communication Arts, Society of Illustrators, One Club for Creativity를 통해 작가로서 인정받았는데,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New York Times, Facebook, Google, Gucci, LG전자 등 세계적인 브랜드 및 매거진과의 콜라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선 2020년 롯데백화점 잠실에서 그의 작품 30여 점이 소개된 적이 있었지만, 코로나19를 이유로 못 보신 분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이번이 국내 첫 대규모 기획전으로, 글로벌 브랜드와 함께한 커미션 대표작과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신작, 오리지널 일러스트레이션 120여 점을 선보입니다.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Ilya Milstein : Memory Cabinet》전은 Cabinet1 <티레니아해 옆 서재>, Cabinet2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 Cabinet3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 Cabinet4 < 캐비닛 속 분실된 초상화>로 4부 구성으로, 중간에 작가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획된 <책거리>란  특별 섹션이 있습니다. 작품만 있는 건 아니고 중간에 포토존처럼 오브제를 만들어둬서 공간을 너무 평면적이지 않게 꾸몄더라고요. 각 부 설명 옆에는 캐비닛 서랍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보이는 오브제를 부착해 뒀고요. 작품마다 봐야 할 디테일이 많긴 하지만, 오리지널 드로잉을 제외하고는 지클레(Giclée) 판화로 인쇄된 작품들이라 사이즈가 작지 않아 편안하게 볼 수 있고 시리즈 작품들도 여럿이라 연결해서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다~ 대표작으로 봐도 무방하나 모두 소개드리긴 어려우니 제가 좋아하는 작품 위주로 소개할게요.  

1부 <티레니아해 옆 서재> 전시 작품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1부에서 제가 가장 집중했던 작품은, <A LIBRARY BY THE TYRRHENIAN SEA>(2018)입니다. 제게 일리야 밀스타인이라는 작가를 각인시킨 작품으로, 전시장 가장 중앙에 설치되어 있어요. 양옆으론 서재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화면 속 인물이 서가 가운데 뚫린 창을 통해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것처럼, 전시장에서도 이 창을 통해 '그곳에 함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관람객을 동화시킵니다.  타인의 서재를 구경하는 재미도 선사하는 이 그림들은 '나도 저런 서재를 갖고 싶다'란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고요. 책으로 빼곡한 서재 한가운데서 지중해의 푸른 티레니아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라는데,  양 옆의 여성은 연인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 섹션 자체가 작가의 자아가 두드러지는 작품과 연인을 묘사한 작품을 주로 선보이니까요.

©일리야 밀스타인

왼쪽 상단부터 <연인>(2019), <포도밭에서 일어난 일>(2018, 더 뉴욕 타임스스타일 매거진 커미션 작품), <버려진 교회에 누워있는 연인)(2018), <둘만의 대화>(2019, 더 뉴욕 타임스 스타일 매거진 커미션 작품)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 소재는 일상에서 차용된 것들이 많습니다. 개인의 감정과, 추억, 기억, 사물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미지가 그의 화폭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보여주죠. 소재나 주제에서 오는 스토리의 보편적인 공감과 함께 다채로운 색상과 구도, 공간에서 주는 시각적 새로움도 그의 작품이 주는 매력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디테일이 많아도 답답하지 않고 평범해도 질리지 않고 보게 되더라고요.


해설에 의하면 그는 미드센추리 프랑코-벨기에 만화스타일, 르네상스시대 네덜란드 세밀화, 일본의 목판화 등 다양한 사조와 예술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이나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이 언급되기도 하던데 그 외에도 이집트와 아즈텍 상형문자 등의 요소에서도 영감을 받았고, 그의 그림 속에 현대미술 작가들이 등장하기도 하니,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죠.  전시장에 있는 인터뷰 영상을 보면, 현재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10대 때 그렸던 방식과 아주 비슷하고, 의식의 결정이라기보다는 몸의 밴 습관으로 배어 나오는 글씨체와 같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렇게 그의 화풍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화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거겠죠. 각자가 지닌 고유한 글씨체처럼요.

다양한 브랜드 커미션 작품들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브랜드 협업으로 인지도가 올라간 만큼, 전시 출품작 중엔 커미션 작품이 많습니다. 브랜드의 이미지는 제고시키면서 단독 작품으로 보기에도 무난해, 사실 저는 설명을 읽기 전까지는 브랜드 협업 작품이란 생각을 못했었어요.

우선 가장 왼쪽 하단에 있는 그림은 <봄의 장면>(2023) 연작 중 첫 번째 <푸른 초원을 찾아서>입니다. <봄의 장면>은 의류 브랜드 '페인터 재킷' 커미션 작품으로 총 3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림 속 붉은 체크무늬 옷이 꽤 인상적이죠. 상단 중간 그림 <다리>(2021)는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커미션 작품입니다. "작품 한가운데 수직선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슈트레이멜을 쓴 유대인들이 이디시어 간판이 있는 거리에 모여있는 과거의 모습을, 이와 반대로 오른편에는 유대 요리 크니쉬를 판매하는 빵집이 있는 현재 뉴욕 맨해튼의 모습을 병치"하고 있는데, 2021년에 듀오링고에 이디시어가 추가된 것을 기념해, 듀오링고가 이들을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 아래엔 LG 전자 커미션 작품으로,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2022)입니다. 이 작품 외에도 LG전자 커미션 작품이 있지만, 이 작품이 특히 더 한국적인 요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메시지도 분명했지만, 그에 앞서 LG 냉장고 안에 복분자주, 소주, 박카스와 청자, 목안 등 우리 것이 많이 보여 좋았습니다. 그 옆엔 <구찌>(2022)와 양주 브랜드 <봄베이 사파이어>(2019)의 커미션 작품이고요. 브랜드가 우악스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미지 메이킹이 제대로 되니 협업 의뢰가 끊이지 않나 봐요.

<책거리> 속 오리지널 드로잉 사진 :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전시장 중간쯤엔 <책거리>라는 특별 공간이 있습니다.책거리(책가도)는 우리나라 궁중회화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림 형식으로, 책과 서가, 그 안에 놓인 꽃, 기물 등을 소재로 합니다. 소장가의 컬렉션과 수집 취향도 엿볼 수 있는 그림이죠. <책거리>와 자신의 대표작인 <티레니아해 옆 서재>를 접목해 기획된 이 특별 섹션에선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그의 원화 드로잉을 전시하고 있어요. 전시 출품작의 원화드로잉도 있고 아닌 것도 섞인듯한데, 보다 보면 디테일에 감탄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작가는 일반적으로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서 시작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종이 위에 펼쳐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채색이 된 상태로 봤을 때도 작업량이 꽤 많았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원화를 보고 나니 작업량은 물론 꽤 많은 사색의 시간을 필요로  했겠다 싶더라고요. 예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과는 또 다른 결로, 디테일과 가독성이 뛰어나죠.  

<1983년 여름 뉴욕>(2018)시리즈와 <상상 속> 시리즈(2021)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전시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찾아보는 재미를 가장 많이 준 작품은 <1983년 여름 뉴욕>(2018) 시리즈와 <상상 속> 시리즈(2021)였어요. 커미션으로 제작된 두 시리즈 모두 4점의 작품 구성으로, <1983년 여름 뉴욕>은 1980년대 뉴욕의 모습을, <상상 속>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거리와 특징을 녹여냈죠.

<1983년 여름 뉴욕> 시리즈의 배경은, 소호의 저녁, 할렘의 늦은 아침,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오후, 이스트 빌리지의 늦은 밤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은 실제 존재했던 장소라고 해요. 그림 속엔 앤디 워홀과 장 미셀 바스키아 같은 유명 인사도 등장하고 키스 해링 등 당대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장르 구분 없이 어우러졌던 '클럽 57'처럼 명소들도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상상 속> 시리즈 역시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이 작품은 뉴욕에 기반을 둔 면도 상품 제조 회사인 '해리스' 커미션 작품이라, 해리스(Harry's)란 이름이 각 나라별 언어로 변형되어 표현되어 있고, 다양한 크기의 면도기와 면도날이 자주 등장한다는 특징을 보이죠. '처음엔 왜 저렇게 면도기가 많이 등장하지?' 싶었어요, 설명을 읽기 전엔. 게다가, <상상 속 벨기에>에서는 만화가 에르제의 대표 캐릭터 땡땡(Tintin)과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상상 속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인 세르쥬 갱스부르가 면도날을 물로 길을 거닐고 있고, <상상 속 독일>에서는 독일 전통 민속 의상을 입은 커플과 독일의 소시지 요리인 '커리어부어스트'가, <상상 속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의 특산품인 고다 치즈 덩어리를 들고 있는 남성과 전통의상과 국화인 튤립이 등장하는 등 작가 고유의 필치와 지역색이 잘 어우러져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넘쳐납니다.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일리야 밀스타인

작가의 작품들이 대부분 서정적이긴 하지만, 전시장에선 사회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사례의 초기 작품들과 다른 결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림은 동글동글한데 내용은 까칠까칠하달까, 반전이 있어 더 오래 기억되긴 하더라고요. 전시장에는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이나  싱어송 라이터 '보스'의 데모곡,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어요.

<라따뚜이>(2023) 픽사와 디즈니 커미션 작품 ©  일리야 밀스타인, 사진 : 네버레스홀리다

전시는 전반적으로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기분 상한 일이 있어도 전시를 보고 나면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랄까. 작품 수가 많은 듯하면서도 쓱~보게 되는 부분도 있어서 개인마다 관람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한번 쓱 보고 다시 한번 돌아봐서 한 시간 반 정도 머물렀어요. 첫날이라 그래도 좀 한산했고, 도슨트 프로그램도 없었어서 사람이 몰리지 않아서 더 여유롭게 봤습니다. 현재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운영되니 그 시간에 맞춰봐도 좋고, 그냥 가서 개인의 느낌으로 보고 나와도 되고요. 몇몇 작품에는 설명이 붙어있고 그게 아니어도 오디오 가이드가 있긴 하니까 참고하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하세요. 아프지 말고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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