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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기록] 조선왕릉 40기를 훑다

예술 이야기

[한여름의 기록] 조선왕릉 40기를 훑다(feat. 서울 소재 조선왕릉)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무섭게 내렸죠. 화창했던 오늘은, 가을의 완주를 기다릴 새도 없이  슬쩍 겨울에 새치기를 당한 듯한 날씨였고요. 내일은 더 춥다는데, 이렇게 겨울이 당겨질 줄 알았으면 주말에 부지런히 좀 다닐걸. 후회는 언제나 늦네요. 날이 추워져서인지 오늘 유독 한여름에 짧고 굵게 다녀온 원정이 떠올라, 지난여름 기억을 되짚어 여기에 긁적여봅니다.  


올해 여름 저는 조선왕릉 40기를 훑어봤습니다.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기도 했고, 어쩐지 올해가 아니면 앞으로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때마침 출범한 조선왕릉원정대에 선정되어 조선왕릉 40기를 훑고 왔습니다. 가보기 전엔 '뭐 특별한 게 있겠어?' 싶었는데, 다녀보니 다르더라고요. 원칙에 따라 조성된 왕릉이니 구조는 대동소이하나, 조성된 시대와 그 지역의 자연 지형 등의 변수가 능묘 건축에 디테일로 작용해 색다른 즐거움을 줬죠.  물론, 이 재미를 느끼려면 한국사나 전통 건축에 정통하거나 능 해설사와 동행해서 설명을 들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지만요. 어쨌든 일주일 동안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40기를 돌아봤는데, 의미는 있었지만 한 번에 몰아보면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섞이니, 여유를 두고 하나하나씩 보는 걸 강력히 권장합니다. 

 (왼) 한눈에 보는 조선왕릉 분포도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누리집 (오)© 네버레스홀리다

 아시다시피, 조선왕릉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으로, 총 44기(基) 중 북한에 있는 제릉 (태조비 신의황후)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를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효릉(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이 개방되면서 40기 전면 개방에 정점을 찍었죠. 능은 대부분 고양, 김포, 파주, 화성, 남양주, 양주에 있지만, 서울에도 정릉, 선정릉, 태강릉, 의릉처럼 대중교통으로 가볼 수 있는 곳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접근성이 좋은 서울 소재 왕릉을 소개합니다.  

왕릉 입지와 제향 공간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

첫 번째로 소개할 조선왕릉은, 태조비 신덕황후가 잠든 사적 제208호, 서울 정릉입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도보로 15분 정도 언덕길을 오르면 닿아요. 가도 가도 주택가라 ‘여기에 능이 있을까’ 싶었는데,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 거의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 정릉 매표소가 보이더라고요. 담장 밖에서 봤을 땐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 들어가니 물도 흐르고 숲도 우거져 도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정릉 © 네버레스홀리다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은, 원래 1397년에 현재 중구 정동에 조성되었다가 140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된 건 1669년입니다. 이곳으로 능을 옮길 때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던 태종에 의해 이전 능에 있던 정자각과 병풍석을 태평관과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고 하죠. 지금 청계천 광통교에 가도 이 병풍석을 볼 수 있는데, 막상 광통교 밑에 가서 거꾸로 설치된 병풍석들을 보면 좀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살면서 가급적 누군가의 미움은 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광통교 © 네버레스홀리다

정릉은 왕비의 능침이 단독으로 조성된 ‘단릉’ 형태로, 능침은 추존 왕비 능제에 맞게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을 생략하고 문석인과 석마, 석양, 석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배치했어요.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 옛 정릉에서 옮겨온 석물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조성했다고 해요. 장명등도 고려시대 공민왕 능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라고 하니 눈여겨보고 싶었으나, 자연 지형에 맞춰 능침이 자리하다 보니 아쉽게도 일반 관람 시엔 가깝게 볼 수 없다는 게 맹점입니다.    

정릉 © 네버레스홀리다

사적 제199호 선정릉은 유일하게 왕릉과 주변 도시 전경이 한 시야에 잡히는 곳입니다.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고 주변도 번화해요. 이 주변엔 이렇다 할 공원이 없어 코로나19 때 정말 많은 시민들이 선정릉을 찾아 자연을 만끽하며 휴식을 즐겼다는데, 돌아보면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됩니다. 

선정릉 © 네버레스홀리다

선정릉엔 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과 11대 중종의 능이 있어요. 1495년과 1530년에 조성된 선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입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죠. 정릉은 ‘단릉’이고요. 한두 시간 쉬엄쉬엄 유람하듯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선릉의 경우 일반 관람 시에도 능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장소가 있긴 합니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인 게 좀 아쉽긴 하지만요.   

선정릉©네버레스홀리다

지하철역에서 수분 거리 내에 있는 태릉은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 씨의 능입니다. '태릉'이 익숙하지만 정확하게는 11대 중종비 문정왕후와 13대 명종과 인순왕후가 잠든 사적 제201호, 태릉과 강릉으로 구성되어 있죠. 태강릉을 둘러보고 나니  이곳의 기운이 좋아 근거리에 태릉선수촌, 육군사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등 다양한 육성기관이 자리한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어요. 

태강릉 © 네버레스홀리다

문정왕후는 원래 남편 중종의 능인 현재의 정릉에 같이 묻히길 바랐지만, 비가 올 때마다 정릉에 침수 피해가 발생해, 아들 명종이 문정왕후 사후 태릉을 조성해 어머니를 모셨다고 해요. 그래서 태릉은 '단릉'입니다. 강릉은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쌍릉’입니다.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에 따라 오른쪽엔 왕 왼쪽에는 왕비를 모셨죠. 능침에 조성된 문석인과 무석인, 장명등, 망주석 등은 태릉 조성 후 2년 만에 조성되어 태릉 석물의 조각 기법과 생김이 유사하다고 하니,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셔야 해요.   

태강릉 소재 조선왕릉전시관 사진 : 네버레스홀리다

또 태강릉에는 조선왕릉전시관이 있어 태강릉의 공간 배치나 왕릉 조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얻을 수 있으니 꼭 들러보세요. 


사적 제204호 의릉은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 왕후 어 씨의 능입니다. 1960년대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세워진 부속건물들 때문에 능역이 크게 훼손되었다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진행된 복원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죠. 아직 복원이 마무리된 건 아닙니다. 

의릉 © 네버레스홀리다

유난히 맑고 유난히 덥던 날에 의릉을 방문했는데, 여긴 확 트인 정경이 매력적이더라고요.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요.  오늘 소개한 곳 중 한 곳만 지금 다녀오라고 하면, 전 의릉에 가보고 싶습니다. 이 계절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거든요.     

의릉 © 네버레스홀리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된 ‘동원상하릉’으로, 곡장을 두른 위의 봉분이 경종의 능, 곡장을 두르지 않은 아래의 봉분이 선의 왕후의 능입니다. 능역 내에 중앙정보부가 자리해 한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의릉은,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청사는 헐렸지만, 1972년 7월 4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분단 이후 남과 북이 처음으로 합의한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강당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제92호로 지정되어 남아있죠. 나상진(1923-1973) 건축가가 설계한 이곳의 내부는 일반 공개가 되지 않지만, 유리문을 통해 로비와 강당 내부도 조금은 볼 수 있으니 의릉 방문 시 잊지 말고 둘러보세요.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구 중앙정보부 강당 © 네버레스홀리다 

의릉 매표소에서 도보 수분 거리엔 올해 개장한 의릉 역사문화관도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의릉의 역사와 변천 과정은 물론 왕릉 조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어 왕릉을 보기 전 사전 학습 개념으로 들르면 좋죠. 7·4 남북공동성명 당시와 중앙정보부 강당 모습도 영상이나 자료들을 통해 볼 수 있으니 꼭 잊지 말고 방문하세요.  

의릉 역사문화관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조선왕릉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얻어지는 게 정말 달라요. 공원처럼 휴식할 장소로 찾는다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지만, 역사나 문화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한다면, 방문 전 홈페이지를 통해 간단한 이력과 해설 시간, 능침 개방 시간 등을 체크하고 일정을 잡는 게 좋습니다. 능침 구역은 일반적으론 개방이 되진 않지만 별도의 능침 개방일이 있어 볼 수 있는 곳도 있어요. 또, 정기해설 시간도 있으니 이를 잘 활용해도 좋고요.


만약 좀 더 종합적으로 조선왕릉을 돌아보고 싶거나 자료를 보고 싶다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 무료 제공하는 『가보자 능』과, <조선 왕실과 왕실 계보> 지도 pdf를 무료 다운로드해 참고하면 좋습니다. 『가보자 능』에는 조선왕릉 40기에 대한 전체 설명이 들어있고, <조선 왕실과 왕실 계보> 지도는, 복잡한 조선 왕실 계보를 한눈에 보여줘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반적 흐름을 이해하기 좋아요. 


아! 왕릉은 대부분 풍수지리와 자연 지형에 맞게 조성되어 완벽한 평지인 경우가 없어요. 다니기 불편하진 않지만 낮은 구릉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니 운동화가 가장 편하고, 내부에서 음식물을 먹거나 쓰레기를 버릴 수 없으니 밖에서 드시고 가볍게 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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