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예술가가 숨 쉬는 집]-박서보재단 前기지재단

예술 공간 이야기

[예술가가 숨 쉬는 집]-박서보재단 前기지재단(서대문구 연희로 24길)


맑은 하늘에 쌀쌀함이 가득한 영하의 날씨라니! 밖에 담아둔 물이 있었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얼었더라고요. 집 안으로 들어와 창가에 올려놓았던 작은 식물들을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내려놓고, 밖에 뒀던 큰 식물들도 모두 방으로 들여놓는 것으로, 가볍게 월동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제 잠들기 전에 오늘 일어나면 뭐부터 해야지~ 하고 생각해 뒀던 게 있었는데, 찬 바람 조금 맞았다고 '순서를 조금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역시 인간의 의지는 참 ~ 약해요 : ) )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KBS 라디오 클래식 FM에 채널을 맞춰두고, 오후에 하려던 포스팅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4일,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1931-2023) 화백의  별세 소식이 들렸죠.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지만, 작품을 오래 보아왔고, 제 지인들과 오랜 인연이 있는 분이었던 데다, 그분의 작품을 매개로 맺어진 저와 제 친구와의 사연도 있어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제게 화백의 별세 소식과 함께 짧은 인연을 나열하며 그를 애도했고, 저는 제 지인에게 화백의 별세 소식과 함께 그들 사이의 긴 인연을 짧게 나열하며 추모하되 슬픔에 오래 잠식되지 않기를 바랐죠. 그러고 나니, 박서보 화백의 작품이 보고 싶더라고요. 개인전이 없어도 연합전 등에서 나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번엔 좀 특별한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박서보 화백의 집이자 그의 작업실, 그리고 현재 박서보 화백의 모든 것을 보관하고 있는, 박서보재단에 다녀왔습니다.

(왼) 조병수 건축 설계 드로잉 출처: http://www.bchoarchitects.com/ws/projects/gizi-exhibition-and-residence

박서보재단은, 2019년 기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비영리 재단법인입니다. 화가 박서보가 낸 재원으로 설립되었죠. ‘기지 GIZI’는 중의적으로 '활동의 거점', '상황에 대응하는 지혜와 기개'를 의미하는데, 얼마 전 화백의 별세와 함께 공식 명칭이 "박서보재단"으로 바뀌었어요. 현재 제주도에 박서보미술관이 건립 중이고, 연희동 박서보재단 옆에 박서보기념관도 공사 중이라, 현시점에서 박서보 화백의 삶과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식 공간은 박서보재단이 유일합니다.  


박서보재단에서는 매주 수요일 2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재단 건물 내에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거든요. 예약 시간 외에는 공개되지 않는 곳이라 꼭 누리집을 통한 사전 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는데, 예약 가능 인원도 많지 않은 데다 금방 마감이 되어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죠. 그러다 운 좋게 예약에 성공해서 다녀왔는데, 확실히 예술가가 실제 사용한 공간이 주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신진작가 전시실이자 도슨트 대기 장소인 로비층 내부 사진:네버레스홀리다

투어 프로그램 참여자 예약 확인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대기석에서 이뤄집니다. 그 후 신진작가들 전시공간이자 대기장소인 로비에서 영상과 작품을 보며 다른 참가자들을 기다리죠. 시간이 되면 직원을 따라 1층 전시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탑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엔 박서보 화백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문제는 이동 시간이 짧고 그나마도 사람들에 가려 잘 보지 못한다는 거죠.

1층 서보홀 내부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1층 전시장에 도착하면 박서보 화백의 물품이 놓여있는 개인 사무 공간(리셉션)과 전시 공간이 수평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고 있습니다. 개인 사무공간에는 얼마 전 장례식장에도 놓였던 영정 사진이 놓여있고요. 매체를 통해 알려진 투병 기간 동안 사용한 휠체어와 보조 기구들, 사용했던 연필들도 놓여있는데, 영정사진에 검은 띠가 둘러져 있긴 했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살아계신 듯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전시 작품들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투어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됩니다. 먼저 전시실에 걸려있는 작품들을 설명해 주고, 그다음엔 개인 사무공간의 소품들을, 그 이후엔 외부 정원을 돌아보았죠. 중간중간 참여자들의 질문도 받았고요. 전시된 작품은 묘법 시리즈로, 초기 묘법부터 후기까지 그 변화 과정을 볼 수 있고, 설명을 함께 들으니 작업 방식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이전의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봤지만 그 의미나 가치에 대해 잘 몰랐던 분들에겐 좋은 경험이 되겠더라고요. (작가 및 작품 설명은 박서보재단 누리집을 참고하세요.) 작품 외에도 곳곳에 놓여있는 달 항아리가 또 다른 볼거리이고, 전시 작품과 서로 호응하는 야외 정원 역시 이끼와 돌, 마사토, 매화나무로 멋들어지게 꾸며져 인상적이었어요.   

전시장과 연결된 1층 야외정원 사진: 네버레스홀리다

박서보재단은 지하 2층과 지상 4층으로 구성됩니다. (실제 표기는 좀 달라요.)  전시장 외 다른 층은 외부 공개가 되지 않기에 다른 장소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축물을 디자인 한 조병수 설계사의 설계 기록에 따르면 "(기지는) 상업시설, 갤러리, 오피스 그리고 다가구주택, 총 4가지 다른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중략) 상층의 주택 부분은 한 가족의 3세대가 거주하는데 각 가구의 프라이버시를 유지하며 외부공간을 공유할 수 있도록 가구들을 수평적, 수직적으로 분할 배치하고 그 중앙에 중정을 두었다"라고 하죠. 또 "각각의 프로그램은 그 특성에 맞는 공간구성을 가져야 하며, 외부환경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어야 했다. 상업시설은 접근성이 쉽고 시인성이 좋아야 했으며, 갤러리는 프라이빗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담백한 공간이며 외부의 시선이 차단되어야 했고, 오피스는 업무가 가능한 차분한 공간이어야 했고, 주택은 세대 사이에 중정을 가지고 내부에서 뷰를 확보하며 답답하지 않아야 했다. 기지의 프로그램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수직적으로 나누어져 적층 배치되었다"라고도 언급했는데, 다른 공간은 모르겠지만 도슨트 투어가 이뤄지는 갤러리는 확실히 그 특성이 잘 살아있습니다.


경력이 많은 건축가라도, 거장이라 불리는 예술가의 공간을 맡아 설계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적어둔 설계 콘셉트에서 이런 고민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어요. "건축주는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화가 박서보로, 그의 작품 [묘법] 시리즈에서 반복과 중첩을 통해 단순함 속의 깊이감, 단순함 속의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박서보 화백은 건물에 본인의 예술세계가 표현되지 않아도 된다고 요청했으나, 그의 작품세계에서 나타나는 단순함, 깊이감 그리고 미세한 변화가 숨 쉬는 건물을 만들고자 했다. (중략) 프로그램들의 상이한 특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외장재를 사용하는 것보다, 여러 특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단일 외피를 스터디하였다. 특히 외피는 화가 박서보의 근작에 적용된 ‘공기 색’을 차용했다. ‘공기 색’은 맑고 밝은 푸른색으로 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깊이감을 만드는 색으로 화가 박서보는 이 색을 볼 때 ‘호흡이 더 잘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건축물 외관 타공 이미지 출처: http://www.bchoarchitects.com/ws/projects/gizi-exhibition-and-residence

또, 자꾸 시선을 끄는 닮은 듯 다른 외관에 대해선 "'공기 색’처럼 빛과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외피를 만들고자 했다. 알루미늄 판재를 타공하고 절곡 하여 이어 붙이므로 빛과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외장재를 개발했다. 외피의 원형 구멍들은 수직 방향으로 그 크기가 변하는데, 아이 레벨에서 그 지름이 가장 커서 70%의 개구율이 확보된다. 개구율은 아이 레벨에서 상하부로 갈수록 줄어들어 보는 각도에 따라 막혀 보이기도, 트여 보이기도 한다. 또 이 타공 외피는 외부에서 잘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내부에서는 비교적 잘 내다보여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는 동시에 바람이 통하는 역할을 한다. 타공판들은 둔각으로 절곡 되어 연결되는데, 이 접힘이 자체적인 구조적 강성을 확보하여 타공판들을 지지하는 고정 부속 자재의 양을 최소화시킨다. 또한 이 접힌 면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빛의 반응(반사, 통과, 겹침)을 이끌어내는 입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내부의 육중한 매스와 중첩되어 시시각각 다채로운 깊이감을 만든다"라고 했으니, 내외부 관람 시엔 꼭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겠죠?


전시 투어를 원한다면 박서보재단 누리집에서 예약하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약에 성공만 하면 동반 1인도 가능하고요. 내년이나 내후년이면 박서보미술관과 기념관이 완공되고 그렇게 되면 생전에 사용하셨던 이 공간을 살펴보긴 더 어려울 테니, 이왕 가볼 거라면 꼭 그전에 사전 예약을 마치는 게 낫겠죠.   


아! 그리고 가기 전엔 얼마 전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방영된 <박서보 폭풍, 고요> 편을 보고 가면 더 좋습니다.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담았고, 장례식 이후의 아내분 인터뷰도 있고요. 그의 삶과 작업, 그리고 그와 뗄 수 없는 '단색화'의 의미 등 짧지만 깊게 그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키워드들이 잘 담겨있거든요. KBS 누리집이나 공식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으니, 제 글을 읽은 후에 바로 보셔도 좋고요. 보고 난 후엔 '물방울 작가'김창열 화백이 떠오르실 텐데,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으니, OTT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참고로 전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왼)출처: KBS 다큐인사이트 (오)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그럼 오늘도 따뜻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작가의 이전글 [한여름의 기록] 조선왕릉 40기를 훑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