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간 이야기
곧 여름이 올 듯하다가, 초가을의 기운이 스치는 바람을 가끔 맛보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5월부터 무성했던 초록은 6월과 함께 절정에 가까워져, 시선을 어디에 둬도 예쁜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고요.
그래서 그런가,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네요. 확 트인 자연이 있는 곳으로 ㅎ
일상을 이어가다 보면,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어도 주변 상황과 산재한 일들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진짜 여행 가는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곳을 알려드립니다. 여기는, 멍~하니 있다 와도 좋고, 100% 충전한 노트북과 핸드폰 들고 가서 작업하기도 좋고, 평소 운동부족이 고민이었다면 운동도 하고, 문화생활도 하고, 기분 전환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뭘 해도 좋고, 혼자 혹은 누구와 함께 가도 좋은 곳이니, 비가 오거나 너무 춥지 않은 날만 피해서 꼭 한 번 가보세요. (그래도 꼭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길 권합니다! 아니면 분명 아쉬워질 테니)
목인박물관 목석원은 2006년 인사동에 개관한 사립박물관입니다. 2019년 부암동으로 이전하면서 목인박물관 목석원으로 재개관했죠."목인"은 나무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전통 목조각상을 지칭하는데, 각종 의례나 주술 · 종교적 목적으로 만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장승、무덤에 부장용으로 쓰였던 목용(木俑)、불교 목조각상、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용도로 신당에 쓰였던 신상、돌아가신 분을 저승으로 모시는 상여 장식용 조각 꼭두、혼례에서 사용된 목안(木雁)、잡귀를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 등이 목인박물관의 소장품입니다. 부암동으로 옮긴 후 더 특별해진 점은 약 3,000여 평 규모의 야외전시장이 생긴 건데요, 여기엔 무덤 앞에 세워 피장자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고 벽사의 기능을 겸했던 석물(石物), 즉,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동자석(童子石)과 같은 석인(石人)、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석수(石獸) 등을 배치해 둬 분위기가 아주 신령스러워요.
앞서 말한 소장품들이 이곳을 가봐야 하는 주요 이유이지만, "꼭 가보라"라고 추천하는 이유는 박물관의 입지와 공간 구성이 너~무 멋져서입니다. 서울 도심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지거든요. 여긴 부암동주민센터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부터 시작해 언덕길을 10~2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해서 택시를 타고 올라오는 분도 많아요. 높긴 높거든요. 가는 길엔 무계원이라는 전통문화공간을 스치게 되는데, 그 앞 양갈래 길에서 왼쪽 언덕 끝까지 오르면 목인박물관, 오른쪽 언덕 끝까지 오르면 자하미술관이 있습니다. 갈림길 양쪽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이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곳은 여기밖에 없을 거예요. 어쨌든, 물 한 병 손에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언덕길을 오르다 '여기에 있긴 할까?' 하는 의심이 무한대로 들 무렵, 박물관 표지를 만나게 됩니다. 미술관도 그래요 ㅎ
입구에 도착하면 정면에 하얀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박물관 입구입니다. 입장료 만원(음료 한 잔 포함)을 결제한 영수증을 받아 직진해 작은 카페로 가면 음료 한 잔을 주고요. 커피·녹차·주스와 같은 기본 메뉴만 있지만 딱 갈증이 날 무렵에 도착하다 보니 감로수가 따로 없어요. 게다가 어디에 걸터앉아도 주변 풍경이 좋아 눈이 즐겁죠. 어지간한 뷰 맛집?? 상대도 안됩니다. 음료를 마시며 숨을 고른 뒤부터 관람을 시작하면 되는데, 제공받은 음료를 들고 전시장을 돌아도 무방하니, 너무 빨리 안 드셔도 됩니다. 하얀집의 왼쪽과 오른쪽 어느 방향으로 관람을 시작해도 무방하지만, 전시실로도 사용되는 하얀집 곳곳을 천천히 둘러본 후 자개장을 붙인 화장실 가까이 난 유리문을 통해 기획전시실로 가는 게 이동이 더 편하더라고요 저는.
하얀집에서 나와 좁은 돌계단을 오르면 기획전시실이 나옵니다. 현재는 <웰빙&웰다잉>을 주제로 전시 중인데, 전시작품은 여기뿐만 아니라 하얀집, 너와집에도 있으니 눈여겨보셔야 해요. 전시를 본 후 가던 방향길로 이동하면, 낮은 언덕을 통해 옥상 전망대로 연결됩니다.
목석원은 산 형세대로 전시장을 배치해 , 박물관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건 낮은 산을 한번 빙 둘러보는 것과 같습니다. 건물 위에는 대부분 전망을 보며 휴식하는 공간이 조성되어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죠. 탁 트인 시야에는 북한산과 북악산, 인왕산이 앞 뒤로 잡히는데, 세 개의 명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정말 드뭅니다. 게다가 다 기운이 좋은 산들이라, 뭔가 복권에 당첨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사보진 않았지만. 앉을 곳도 충분해 산 멍도 가능하고 볕 좋은 날엔 광합성하기도 좋고요. 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야 하지만, 그마저도 꽤 좋습니다. 그래도 야외에 계속 계실 거라면, 시원한 음료보다는 따뜻한 음료를 받는 게 좋겠죠.
예쁜 곳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도 보는 순간 그냥 반한 곳은 세미나룸입니다. 통창을 통해 보는 안과 밖의 풍경이 이국적이면서도 전원적이라 불호가 있을 수 없거든요. 안쪽에 배치된 화판도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요. 내세에 대한 염원이 깃든 판 형태의 조각인 화판은 주로 상여장식으로 쓰입니다. 연꽃, 모란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꽃들이 등장하고, 다산을 상징하는 물고기,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메신저 역할을 한 새 조각들도 있죠.
옛 가구가 멋스럽게 배치된 피크닉하우스는, '왜 김밥이나 샌드위치 등을 싸서 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소풍 오고 싶다'라는 욕구를 마구 샘솟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갈 땐 먹을 것 챙겨서 가려고 이미 메뉴도 다 정해뒀어요, 아주 간단한 걸로 ㅎ 세미나룸도 그렇지만 이곳 역시 많은 분들이 인생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데, 사실 박물관 어디서도 인생뷰와 사진을 경험하고 남길 수 있어 연령、성별、국적 구애 없이 많은 분들이 찾고 계세요. 서울 근교에 이름난 예쁜 곳들과 견주어도 전혀 처지지 않고 풍광은 오히려 더 압도적이니까요. 입장료 만원이 비싸다고 느낄 순 있지만, 요즘 어지간한 전시가 이만 원, 뷰 좋은 카페 음료 가격이 만원을 훌쩍 넘고, 떡볶이 김밥도 오천 원대, 밥 한 끼가 만원인 물가를 생각하면, 절대 비싸지 않아요. 가성비와 가심비를 충족해 주니까요. 그럼에도 혹시 비싸다 생각이 들거나 전 가족 나들이에 부담이 된다면,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문화의 날'에 맞춰가세요, 그땐 할인이 있습니다. 꼭 날씨 좋은지 확인하시고요.
박물관 야외전시장 곳곳에 있는 석물 중 대부분은 왕릉이나 사대부 묘 앞에 세워뒀던 문인석、 무인석、동자석입니다. 조선시대 왕릉에 가본 적이 있다면 보셨을 텐데, 우리나라 능묘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우는 제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사대부 묘역에는 그보다 늦게 시작되었지고요. 실제 문인처럼 공복에 복두, 금관량을 쓰고 손에는 홀을 든 문인석과 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들고 있는 무인석은 하나의 통일된 형상이 아닌 조각가에 따른 개성이 드러나, 이 차이를 찾아보는 게 좋은 관람 포인트가 됩니다. 또, 묘주의 시중을 들거나 공양하는 시동을 상징하는 동자석은, 머리에 뿔을 닮은 쌍계를 하고 지물을 든 채 무덤 좌우에 있는데, 왕릉에는 없고 묘에만 놓이는 석물입니다. 특이한 건, 손에 드는 다채로운 지물인데, 이는 여러 종교와 무속신앙이 혼재된 형태가 동자석에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동자석과 제주도 동자석은 생김부터가 크게 다른데, 야외 전시장에는 제주동자석만 모아둔 장소가 있으니 유의 깊게 보고 비교해 보세요. 아, 성북동 꼭대기에도 야외전시장이 멋진 석조박물관이 있습니다. 우리옛돌박물관인데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됩니다. 여기도 꽤 높으니, 걷지 말고 타세요. 소장 유물의 성격은 비슷하지만 규모가 다르니, 기회 될 때 한번 가보세요.
목인박물관 석물원을 가꾼 김의광 관장은, 1945년 설립된 태평양화장품그룹(아모레퍼시픽 전신)의 둘째 사위입니다. 다른 직장에 다니다가 1974년 태평양 평사원으로 입사해 30여 년간 화장품과 설록차, 돌핀스 야구단 대표이사를 거쳐 ㈜장원산업(현 ㈜오설록 아모레퍼시픽 그룹 계열사) 회장으로 퇴직한 후 인사동에 목인박물관을 설립한 거죠. 소장품이 많아져 인사동 박물관이 너무 협소해졌고, 새로운 장소를 찾던 중 부암동 산모퉁이 집(현 카페)을 구했는데, 산모퉁이 카페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속 현성이네 집으로, 이곳 역시 뷰맛집입니다. 부암동을 찾는 분들의 대다수는 여길 보기 위해 오는 거죠. 워낙 경치가 아름다워 지금도 데이트 장소로 사랑을 많이 받지만, 드라마 방영 후에는 더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도 엄청났어요, 지금도 적진 않지만요. 목인박물관 목석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람객 입장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그래도 산모퉁이 카페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있어 박물관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같은 부암동이지만 여기도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한 2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나오니, 하루에 다 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요 :) 강철 체력이라면 도전해 보시고요.
김의광 목인박물관 관장은 여러 인터뷰에서 "문화적 충격 때문이었다. 1975년, 그즈음 우연히 미 8군 외국인 지인의 집에서 그 친구의 소장품을 봤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민속품들이었다. 상당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 외국인도 가치를 알아보는 우리나라 민속품을 몰랐다는 사실의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인사동, 황학동, 중앙시장, 청계천 등을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등잔이며 자잘한 민속품들을 사 모았다. 그러다 80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라고 밝혔어요.
또,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DNA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육군 중장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시절 내무, 교통, 상공부장관 등 3개 부처 장관을 역임한 김일환 장군으로, 6.25 당시 육군대령으로서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된 국보 15점, 보물 124점과 한국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트럭 두 대분의 금괴와 은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송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죠. (이 금괴들은 1955년 한국이 IMF 가입할 때 출자금으로 충당됐고 국보들은 휴전 후 세계순회전시를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대요.) 또, 국립중앙박물관회 2대 회장도 하면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고요. 어쨌든, 세대를 거쳐 이어지 문화재 사랑 덕에, 오늘날 우리가 목인박물관 목석원과 같은 좋은 문화 공간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거겠죠. 산모퉁이 카페도요.
야외전시장을 거쳐 다시 하얀집이 보일 때쯤엔, 오른쪽 아래로 지붕 위에 동물들이 올라가 있는 곳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목인창고 전시장입니다. 목인박물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는 곳이죠.
목인창고 전시장 내 하이라이트 유물은 상여와 꼭두(목인)입니다. 박물관 소장 목인은 20,000 여점인데, 그중 우리나라 목인이 약 5.000여 점, 인도, 네팔, 중국, 티베트 등 아시아 목인이 약 3.000여 점이에요. 보면, 정말 형태와 색채가 다양하고, 옛 것이라고는 해도 꽤 현대적인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상여 장식으로 쓰이는 이 목인들에 관해서는 "산업화로 농촌의 젊은이들이 서울로 대거 몰리던 때다.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이 시작되던 그때 우리의 많은 전통 유물들도 함께 방치되고 유실되기 시작했다. 그 유실되는 과정에 상여의 부속품들이 골동품 시장으로 몰려나왔다. 황학동, 청계천, 중앙시장 등 골동품 시장을 돌며 상여의 부속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태생인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여가 매우 생소했다. 그것이 상여의 부속물인 줄 모르고 샀다. 파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도 양반들이 쓰던 장난감이네 농악에서 쓰이는 물건이네 하면서 팔았다"라는 인터뷰를 보며, '참 다행이다, 알아보는 사람 눈에 띄어서'라는 생각도 했죠.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 '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조선의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말입니다. 이 말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에 의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로 좀 더 보편화됐죠. 대부분의 사립박물관은 유지가 어렵습니다. 박물관의 성격 자체가 공익적이라, 영리 활동을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거든요. 그럼에도, 사랑하는 마음과 아끼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사명감을 부여하며 유지하고 보존하려고 애쓰는 거죠. 그러니, 자주 찾아주세요. 그리고, 누군가가 일생을 걸고 모은 소장품이 있는 박물관을 찾을 땐, 꼭 그 마음을 생각하며 소장품을 눈과 마음으로 즐겨주세요. 모두가 오래 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