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 Jun 29. 2023

학부모의 진상력을 키우는 건

호의를 아무에게나 남발하지 말 것  

요즘 뉴스에서 학부모의 진상짓이 도를 넘어 교사들이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귀하디 귀한 금쪽같은 내 새끼이다 보니 부모들의 아이에 대한 관심이 과할 경우가 많은가 보다. 체벌은 당연히 안되고, 훈육도 정서적 학대로 몰아 고소를 하는 부모도 있다니 놀랍다.


소위 말하는 '진상 학부모'는 학교에서도 위세를 떨치지만, 조그만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종종 찾아와 내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곤 했다.




이십 대부터 과외를 시작으로 학원, 방과후 학교, 공부방 등 다양한 사교육을 해 왔다. 이십 대 때는 나한테 반말을 일삼는 학부모가 종종 있었다. 대학생일 때 과외를 하러 가면 "왔어?" 하며 반말을 시전하고 나를 맞이하는 학부모가 있었다. 틈만 나면 처음 계약과는 다른 요구를 은근슬쩍 더 끼워 넣는 식으로 나를 괴롭혔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똑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알았다고 해 버리곤 했다. 반말을 해도 기분 나쁘다고 속으로만 생각했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게 씩씩하게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거라 생각했다. 학부모에 대한 몸에 밴 저자세로 공부방을 열었는데, 그것을 나는 친절이라고 믿었다. 사교육도 서비스업이라 학부모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 수가 적을 때는 학부모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아이가 결석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 보강을 해 줄 태세를 취했고, 집에 혼자 갈 아이가 걱정되어 내 차로 태워 데려다주기도 했고, 직장에서 늦는 부모를 대신해 간식도 주고, 심지어 저녁을 먹여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들은 수업에 관한 궁금증을 빙자해 수시로 나에게 전화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아침이건 밤이건 모두 다 받아 주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해야 되는 것 이상을 하면 그들이 고마워 엎드려 절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나의 어리석은 친절이 화를 부른 경우는 여러 번 있다.

수업을 마친 아이가, 엄마가 일이 있어 오늘 많이 늦는다고 했다. 집에 혼자 있는 게 무섭다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고 괜찮으면 우리 집에 있다가 가도 좋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는 밤 10시가 넘어도 전화 한 통 없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어렵게 언제 아이를 데려갈 거냐고 아이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그냥 집에 보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혀꼬인 목소리의 엄마 주변으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아이의 엄마가 음주가무를 즐기는 동안 나는 아이의 안전한 보호자 노릇을 자처한 호구였다. 정작 그 시간에 나는 쉬지도 못하고, 내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무보수에 상처만 남은 시간 외 근무를 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저녁시간에 수업을 마치고 혼자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갈 아이가 걱정돼 차로 집에 데려다주던 날이었다. 수업을 마칠 때쯤,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이 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여기까지 들으면서 왜 마트에서 장 본 이야기를 나에게 하나 싶었다. ) 너무 무겁다며 아이를 데려다주는 길에 자신도 좀 태워다 주면 안 되겠냐는 거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가는데도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마트는 아이의 집에 가는 길에 있었고, 달리 거절할 명분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한 나의 호의였지만, 그 아이의 엄마는 당연히 누릴 권리로 인식하게 만든 내 잘못도 있다. 내 잘못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내 무덤을 내가 판 꼴이었다. 마트 앞에서 차에 올라탄 엄마는 자신의 아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들, 오늘 수업 잘했어?"

 "아니, 재미없었어."

그 엄마의 그 아들이었는데, 아이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엄마에게 수업이 재미없었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도 친구들과 언쟁하고 자기 멋대로 굴어서 애를 먹고 있는 아이였다.

 "어휴,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제대로 못 잡으셨나 봐. 하하하."

뭐가 재미있는지 웃으며 신나게 떠드는 여자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놓인 상황은 내가 만든 거였다. 그러니 내가 해결해야 했다. 운전하는 나에 대해 뒷자리에서 히히덕러리던 모자를 집 앞에 내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에서 혼자 울었다. 울면서 욕도 좀 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분함은 가시지 않아 결국 그 아이의 엄마에게 도저히 아이와 수업할 수 없겠다고 말했다. 그 후에 그 엄마의 광폭 행보는 나를 또 힘들게 했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백 명 중 한 명만 만나도 그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좋은 직업의 대표 주자인 학교 선생님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한 학부모 한 두 명 때문일 것이다. 착하고 귀여운 아이 백 명이 주는 기쁨과 보람을 진상 학부모 한 명은 단 번에 날려 버린다.


한 달씩 계약하는 사교육자와 달리 학교는 1년은 꼬박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사교육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이를 그만두게 할 수는 있지만(이 방법은 후폭풍이 엄청나므로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학교 선생님은 그마저도 못한다. 차에서 울던 나처럼 지치고 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학교를 떠나는 것이라고 짐작한다.


여러 부모와 아이를 겪으며 호의를 남발하지 않는 것이 결국 나를 지키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내 마음의 상처를 최소화하고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교육자이면서 자영업자이므로 약간의 서비스도 베풀어야 손님이 좋아한다는 것도 안다. 나를 지키는 노하우가 좀 생겼다면, 호의를 권리로 받는 낌새가 보이면 두 번의 호의는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나도 건조하게 대한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그렇게 대한다.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데, 그 순리를 거스르고 모두에게 친절하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과도한 친절은 진상의 씨앗을 간직한 학부모의 진상력을 무럭무럭 키웠다.


나는 공부방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적당하게 친절하고, 또 적당하게 불친절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흔 중반에 다시 일을 시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