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환자니까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매일 몸이 너무너무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은 누구에게나 피곤한 것이고, 이제 나도 나이가 있으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구나 하고 '피곤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피곤함'의 정도가 예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을 마치고 나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도 소파에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죽겠다."는 말을 연발하다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이렇게 힘이 든 건 다 그놈에 암세포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모른다. 팔다리가 부러지면 엑스레이로 보이고, 혈압이나 혈당이 높으면 기계로 숫자화 돼 딱 나타나는데, '피곤'은 현대인의 고질병이라 할 만큼 모든 사람이 앓고 있고,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꼬집어 암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갑상선암 증상 중에 '피곤함'이 있다고 하니 암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암 수술을 핑계로 일을 좀 쉬겠다고 말하면서 나는 너무 신났다. 일은 계속해도 되니 제발 암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이제 일을 그만해도 되는구나!' 이런 안도감에 암이 곧바로 없어진 듯 피로도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매일 일이 끝나면 내일 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니, 암이 준 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암 환자니까 좀 쉬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힘들고 피곤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전에는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 당당하게 피곤하다고 할 수 있다. 피곤해도 꾹 참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이제 참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아직 내 아이들에게 엄마의 암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단 일을 좀 쉬게 되었다는 말은 했더니,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충격받을까 봐 암 걸렸다는 말은 못 하고 있는데, 말해도 그런가 보다 할 것 같다. 아이들이 적당히 충격받고 적당히 슬퍼하고, 그러고 나서 자기 일을 알아서 잘하면 좋겠다.
일을 그만뒀으니 이제 뭘 할 것인가. 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사실은 뭘 할지 또 고민에 빠졌다. 일단 글을 쓰고, 읽고 싶었던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난생처음 헬스장도 등록했다. 수술 후 추한 몰골을 대비해 눈썹 문신도 했다.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이 시간을 조금 즐겨도 되겠지. 나는 암환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