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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와 돼지본드

1991년의 어느 날

by 밍님


5학년때의 일이다..

선생님께서 미술시간에 서예를 한다고 준비물을 알려주셨다. 벼루, 먹, 서예붓, 화선지, 신문지, 팔 토시, 물통이었다. 먹물이 묻을 수 있으니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오라고 하셨다.


학교가 끝난 뒤 나는 엄마에게 준비물 살 돈을 받아 문방구에 갔었다. 다른 준비물들을 함께 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벼루가 천 원이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의 우리 집은 많이 어려웠다. 언니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던 나는 엄마의 지인에게 옷과 학용품을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서예도구는 없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준비물 살 돈을 꺼내주시면서 엄마는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문방구 아저씨는 상자에서 벼루를 꺼내 이상이 없는 걸 보여주고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다. 문방구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가 걸렸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단독주택이 대부분의 주거형태였고 집과 집 사이에 공터도 많았다. 당장은 용도가 없어서 노는 땅들이 우리의 놀이터였고 그런 공터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온갖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여기저기의 잡초들, 야생 꽃들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물려받지 않은 새 물건을 산 것이 왠지 뿌듯했다. 내 주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살랑 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봉지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벼루의 무게 때문에 적당히 힘이 들어가다 보니 원심력에 의해 점점 더 빨리 돌아가고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그러다가 철퍼덕!

벼루가 든 봉지를 떨어트리고 만다.


왜 빙글빙글 돌렸을까?

안 그랬더라면 좋았을걸...

왜 얌전히 걸어가지 않은 걸까?

5학년이면 얌전히 집에 갔을 만도 한데...

라는 생각은 지금의 내 생각이고 12살의 어린이는 나도 모르게 봉지를 돌렸겠지.


부서졌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박스를 열어보니 벼루는 두 조각으로 쪼개져있었다.


쿵쾅쿵쾅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 심장소리가 들리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얘기하지?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준비물 잘 사 왔냐고 물으셨다. 움찔 놀란 나는 찔려서 괜히 박스를 열어 놀란 척을 한다.


엄마 지금 꺼내서 보니까 이게 이렇게 쪼개져 있네. 원래 이랬던 것 같아.


차마 내가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까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잠깐 고민하던 엄마한테 내 잘못으로 벼루를 떨어트려서 부러졌다고 하나 더 사게 천 원을 또 달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얘기했는데 엄마가 돈을 다시 주기 어려우면 어떡해...


엄마는 왜 부러진 걸 팔았나... 혀를 끌끌 차며 얼른 가서 바꿔오라고 시키셨다. 아저씨는 멀쩡한 벼루를 확인하고 주셨기 때문에 나는 문방구에 다시 가지 못했다.


주변을 서성이다 집에 돌아와 새 걸로 바꿨다고 이야기하며 떨리는 손으로 신발장을 열어 공구통에 있던 돼지본드를 꺼내 몰래 숨겨놨다.


신발장 구석자리에 낡은 공구통.

언젠가 신발장을 열었다가 작은 쥐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쥐가 튀어나올까 봐 손도 대지 않는 공구통이었지만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엄마가 집안일로 바쁜 틈을 타 몰래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장독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벼루의 쪼개진 면에 돼지본드를 쭉쭉 짜 붙이고는 장독대 사이에 숨겨두었다.

밤 사이 잘 마르겠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숨겨둔 벼루를 확인해 보니 붙어있긴 했지만 조금만 힘주어 뗄 생각을 하면 바로 떨어질 것 같았다. 미술 시간이 걱정되어 학교 가는 길에서도, 수업 중에도 나는 노란 본드가 두껍게 묻어있는 벼루를 생각했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술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

아무렇지 않은 듯 벼루를 꺼냈다.

어쨌든 새것이다.


물을 붓고 먹을 꺼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괜찮은 건가? 안심했던 것도 잠시, 곧 묽은 먹물이 책상 위에 깔아 둔 신문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12살 아이가 제발! 제발! 하며 붙기 바랐던 벼루는 누런 본드를 덕지덕지 묻히고도 먹물을 뱉어냈다.


침착하고 싶었는데 당황한 것이 그대로 티 났다.

옆자리 친구가 어! 먹물 샌다! 한 마디에 시선이 집중되고 본드가 두껍게 발린 초라한 벼루를 모두에게 들키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젖은 신문지에 벼루를 그대로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화선지는 젖지 않았어.

준비물을 안 챙겨 온 것도 아니야.


굳어 있는 내 얼굴을 힐끗 본 짝이 벼루에 먹을 갈면서 은근슬쩍 옆으로 옮긴다.

한마디 말이라도 걸면 내가 울어버릴 것 같이 보였을까? 아무 말 없이 벼루를 가운데에 옮겨 준 짝 덕분에 나는 눈물을 꾹 참을 수 있었다.


아마 나는 그날 글씨를 멋지게 쓰지 못했을 것이다.

미술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기분 좋게 비닐봉지를 빙글빙글 돌리던 그 순간을 후회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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