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앞으로 셔틀버스가 왔다.
나는 고르고, 고르고, 심혈을 기울여 고른 원피스를 입고 호텔방을 나섰다. 가기 전에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틴트도 한번 더 발랐다.
"외모 체크! 왼쪽으로 봐도 괜찮고, 오른쪽으로 봐도 괜찮군. 어때? 나 괜찮아?"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완벽하게 코딩된 로봇처럼 대답했다.
"응. 예뻐. 귀엽고 깜찍해."
비록 남편의 대답은 수년에 걸쳐 훈련된 결과였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셔틀버스 안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우리는 간신히 맨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버스에 누가 탔는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깔끔한 옷차림, 단정한 머리, 조곤조곤한 말소리. 사람을 외형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딱 봐도 '저는 교수입니다'라고 이마에 써붙인 것만 같은 얼굴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나 버리고 가면 안돼. 알았지?"
버스가 도착한 곳은 가격대가 꽤 있어 보이는 고깃집이었다. 중간에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출입문과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고 싶었지만, 버스에서 마지막에 내린 탓에 가장 안쪽 깊숙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중간에 도망쳐 나오기는 글렀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누가 내 앞에 앉을지 궁금해했다.
"어, 교수님!"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 두 명이 우리 앞에 앉았다. 남편의 직속 후배로서 대학병원에서 임상강사, 펠로우 과정 중에 계신 분들이었다. 남편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이쪽은 내 와이프."
나는 두 분을 향해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오..."
"어머, 반갑습니다!"
두 분은 친한 친구처럼 보였다. 남편 말로는 각각 집행부 총무와 회계를 맡고 계신다고 하니 서로 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지내지 뭐. 병원이 망해가는 거 같아서 걱정이지."
남편을 포함한 셋은 병원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도 있었고, 잘 모르는 얘기도 있었다. 대부분은 의대정원 증원과 대학병원 적자 위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불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입에 꼭꼭 넣어 오래오래 씹어 넘겼다. 대화 주제에 낄 수 없을 땐 그냥 열심히 먹는 게 최고다.
언젠가 남편이 부부동반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제안을 거절했다. 나 빼고 싹 다 의사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조금 섭섭해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봐. 만약에 내가 선생님들 모임에 오빠를 부르면 어떨 것 같아? 부담스럽지 않겠어?"
쉬지 않고 고기를 먹으니 배가 금방 불러왔다. 때마침 한 분이 말했다.
"저희는 테이블 돌러 갈게요. 맛있게 식사하세요!"
두 여자분은 술잔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그러면 안 되는데 슬쩍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억지로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안심이 됐다. 남편은 나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나는 빼꼼 고개를 들어 떠나간 두 분의 뒷모습을 살폈다. 다른 교수님들과 술잔을 돌리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든 잘 어울리는 두 분이 부러웠고, 육아와 직장일 모두 잘 해내는 모습이 대단하게 보였다. 야간 당직이 일상인 대학병원의 노동강도는 건실한 남성도 견디기 어려워할 정도로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만약에 내가 의대에 갔다면 어땠을까. 체력이 부족해서 중도 탈락했을 것 같다. 지금이야 전문의를 따지 않고 피부미용으로 빠지는 게 흔한 코스가 되어버렸지만, 십 년 전만 해도 의대를 졸업하면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는가. 남편이 일하는 걸 보면 지쳐서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다들 왔구먼!"
평온한 시간도 잠시, 퇴직을 앞둔 교수님 한 분이 우리 앞자리로 오셨다. 이전에 우리 부부 결혼식에서 주례를 봐주신 교수님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이 됐다.
"자, 자. 다들 한 잔씩 받고."
교수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젊은 교수님들이 우리 테이블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남편의 술잔을 가득 채웠고, 나의 영혼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아참, 술은 드시나?"
교수님께서 물었다. 나는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오..."
교수님은 내 눈빛이 애잔해 보였는지 술잔에 소주가 아닌 사이다를 채워주셨다. 정말 다행이었다.
"건배!"
모두 술잔을 원샷했다. 점점 술기운이 오르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고생인 줄 알면서도 견뎌왔던 건 존경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안 그래?"
다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이 엉켰어.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교수님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듯 술잔에 술을 붓었다.
"아유, 교수님 제가 따라 드릴게요."
"그래, 그래. 다들 건배!"
연이어 술잔을 부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 네. 들어가세요, 교수님."
교수님이 떠나자 남편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우리도 이만 갈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방을 들고 후다닥 식당을 나와 쏜살같이 택시를 잡았다.
"택시, 택시!"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분위기 맞춰주느라 고생 많았어. 한 번 얼굴 비췄으니까 이젠 회식에 안 따라와도 돼."
"아냐, 고생은 무슨."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비싼 고기를 먹었는데도 무슨 맛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되뇌었다.
'존경이 사라진 시대라...'
어쩐지 대학병원 의사에게만 적용되는 말씀 같지는 않았다.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여수 시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밤의 풍경이 더욱 캄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