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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문덕 Apr 02. 2023

나 지금 너무 뿌듯해, 고마워

신선한 기쁨, 신성한 행복


2022년 11월 6일 오전 6시 10분



  월드컵경기장역을 내려 1번 출구를 향해 나오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일요일 해뜨기 전 이 새벽 이 시간에, 영등포 여의서로 벚꽃길 앞 봄꽃축제에 모이는 인파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하얀색으로 된 똑같은 비닐가방을 들고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여자들은 공감이 어렵겠지만, 군대 입영하는 날 많은 인간들이 같은 장소로 모여들 때 받았던 이상한 느낌과 비슷했다) 지하철 역사 안쪽 벽 바로 앞 빈 공간들마다 삼삼오오 모여 가져온 짐을 펼쳐 놨다. 핑크, 노랑, 파랑 등 다양한 색상의 스포츠 테이프를 비닐가방에서 꺼내 팔, 다리, 어깨 등 주요 부위에 붙이고 있었다. 티셔츠 앞면에는 배번호를 붙이고, 느슨해진 운동화 끈은 다시 단단히 매고 있는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 계속해서 보였다. 남자 화장실 앞 줄길이는 최소 20m는 넘어 보였고, 여자 화장실은 40m는 족히 넘어 보였다. 출구 밖으로 나와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지만 지나가는 사람 절반 이상이 일회용 비옷을 입고 있었다. 방수용이 아닌 방한용으로 말이다. 중간중간 반팔 반바지 차림에 비옷을 걸치지 않은 야생 스타일의 사람들이 있었고 떨리는 몸의 열을 올리기 위해 발을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낯설고 새로운 풍경이 나에겐. 웃기면서도 재밌었다. 나 역시 그들 중에 한 명이 되어 같은 행동, 같은 마음으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다는 것에 묘한 동질감과 전우애가 느껴졌다.



출발 30분 전입니다
춥다고 가만히 있지 마시고 몸 푸세요



 2023년 동아마라톤 대회 진행 MC 배동성의 멘트에 나도 모르게 발을 구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 근육을 늘리기 위해 오른쪽으로 90도 수그렸더니, 광화문 광장 앞 이순신 장군 동상의 머리가 왼쪽 위로 향한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90도 수그렸더니 세종대왕 동상의 머리가 오른쪽 위로 향한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두 위인(Great man) 앞에서 스트레칭은 처음이라 괜스레 조심스럽고 어색했지만, 두 분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나를 응원하고 있다고 강제 상상을 하며 준비운동을 마무리했다. 이어서 긴 거리를 달려야 할 나의 육체를 위해 준비해 온 연료들을 입속으로 부어 넣었다. 내 몸에 가까운 물인 포카리스웨트 0.5캔, 잠들어 있는 세포들을 깨워 줄 카페인 주입용 레쓰비 0.5캔, 러닝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해 줄 파워젤 1개 정도다 (다음부터 커피는 마시지 말아야겠다. 10km 부근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없어 고생 좀 했다) 이때 "출발 5분 전입니다" 안내를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진 찍는 사람, 발 구르는 사람, 스트레칭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출발 1분 전입니다. 선두그룹 곧 출발하겠습니다. 멘트를 듣고 나니 심장이 반응했다. 나는 초보자가 뛰는 마지막 그룹에 속해 있어서 선두보다 25분 뒤에 출발하지만, 마치 내가 지금 출발하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앞 그룹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함성을 치며 달려 나가는데 심장 근육이 쫄깃해지면서 세포들이 반응했다. (올드하지만, 2002년 길거리 응원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가슴 뛰는 분위기와 기분 좋은 흥분감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스타트(Start) 라인을 넘었다.





5~ 4~ 3~ 2~ 1~ 출발!!
함성~~~~~~
( Wa~~~~~~~~~~~~~~~ )



  수천 명이 동시에 출발하다 보니 도로 위가 출퇴근길 강남역, 신도림역, 가산디지털단지역처럼 앞뒤양옆 사람들로 붐비는 상태라 빨리 뛰고 싶어도 느린 속도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고속도로 위에서 깜빡이도 안 키고 앞 차들 사이사이를 질주하는 BMW처럼 사람들 사이사이를 비집어 가며 속도를 내는 의욕의 러너들이 몇몇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내 어깨를 스치듯 어깨빵하며 나를 앞질러 갔다. (유튜브를 통해 초반에 무리하면 '절대' 안된다는 진리를 사전 학습한 나는) 분위기 휩쓸려서 오버페이스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마침내 앞에서 달리는 분의 티셔츠 등에 러닝클럽 슬로건으로 보이는 'Happiness is Running at my pace'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분 뒤를 쫓아가며 '내 페이스 빨리 찾아서 그 속도로 마지막까지 가자'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5~10Km 부근 청계천을 따라가고 오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 구간에서는 벌써 반환점 찍고 돌아오는 선두그룹 러너들을 보면서 뛸 수 있었다. 나의 경우 서울 한복판 도로 위를 뛰면서 주변 구경하는 재미만큼이나 반대편에서 뛰어오는 선두그룹 러너들 관찰하는 것도 좋았다. 바나나 인형을 입고 뛰는 사람, 태극기를 두르고 뛰는 사람, '허이팅' 발음으로 '화이팅'을 외치며 지나가는 외국인 여성 러너 등 다양한 캐릭터가 지나갔다. 바지가 너무 작아 엉덩이가 바지를 깊이 먹어 삼키는 바람에 엉덩이 바로 아래 가로라인이 90% 이상 드러난 아저씨 러너를 보고 깜짝 놀라 눈 질끈 감고 얼른 추월했다. 귀 전체를 막는 헤드셋, 후드티, 조거팬츠, 컨버스화 등 동네친구네 마실 거거나 산책하는 게 더 어울리는 복장으로 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그냥 한번 참가해 보는 중인 듯.



재미있네, 20km 까지는.
마라톤은 20km 지점부터 '시작'이다



  20km 까지는 주변 구경하는 재미로 반, 주먹 꽉 쥐면서 반 뛰니까 3번의 마라톤 모두 2시간 이내 기록임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할만하네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21km부터는 5분 단위로 멘탈이 흔들렸다. '아, 이래서 마라톤은 20km부터라는 말을 하는구나', '아, 나는 여기까진가' 갑자기 왼쪽 어깨의 상부승모근, 오른쪽 고관절 바로 옆 허벅지 윗근육, 오른쪽 바깥 복숭아뼈 바로 아래 발목 관절에서 동시에 달리기 정지(Stop) 신호를 보낸다. '더 뛰는 건 무리야 지금 컨디션으로 더 이상 뛸 수 없어, 그만해', '몸도 몸이지만 지금까지 온 거리를 한 번 더 뛰어야 하다니 이게 가능해?' 생각들이 머리 위를 스치면서 현실의 벽 앞에 흔들리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은 내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 나를 일으켜주는 장치들이 곳곳에 있었다.


스펀지

  대회 전날 안내책자에 있는 지도를 볼 때 5km마다 스펀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었다. 그게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가로 5cm, 세로 10cm, 높이 3cm 정도 돼 보이는 하얀 스펀지를 시원한 물에 푹 담가서 코스 내 5km 내외 구간마다 비치해 놓은 것. 이 것을 나는 양손에 하나씩 잡아 정수리 위에서 주먹을 꽉 쥐면 시원한 물이 정수리부터 종아리 뒤 아킬레스 건을 따라 뒤꿈치까지 흘러내려간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구간마다 스펀지 6개씩 소비했다. 온몸에 소름 비슷한 느낌이 들면서, 따뜻한 카페라떼를 쭉 들이켰을 때처럼 눈이 번쩍 뜨이며 정신적으로 각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힘으로 2km는 더 힘내서 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발과 몸뚱이를 질질 끌면서 뛰는 느낌을 받고 있는 그 상황에서 정말 진심 너무 큰 힘이 되었다.


비교

  땀벅벅으로 러닝복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상태로 뛰고 있는 100kg 가까이 되어 보이는 외국인, 마라톤 100번째에 도전 중인 올해 팔순인 할아버지, 몸을 앞으로 30도 정도 수그린 채 엄청난 인상을 쓰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꾸역꾸역 달리고 있는 중년 남성, 키 190cm 정도 되는 군인 포스의 건장한 피지컬이지만 다리에 장애가 있는지 몸을 옆으로 20도 정도 기울인 채 달리는 분, 등에 시각장애인이라고 쓰여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뛰고 있는 자원봉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겸허해지네. 나는 핑곗거리도 없잖아. 저분들도 저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쪽팔리지도 않니. 정신 차려' 위의 분들과 비교하면서 뛰니 마음속에 있던 힘들다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내 주변에서 묵묵히 뛰어내고 있는 수많은 여성 러너들을 보면서도 큰 자극을 받았다. '여자도 저렇게 뛰어내는데, 사지멀쩡하게 남자로 태어나 군대까지 제대한 내가 완주 못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죽어도 완주하고 죽자'


음악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 한 가지를 뽑으라면 단연코 '음악'이다. 평소 조깅할 때 듣는 20여 곡 정도의 최애 리스트가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마약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나의 육체를 적당하게 흥분시키고 고통을 느끼는 신경들만 취사선택해서 마취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고통을 잊어버리고 러닝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최면에 걸린 느낌이었다. 20km부터 최대 볼륨으로 음악을 틀었다. 야구장에서 쓰는 두 개의 막대 응원풍선이 부딪힐 때 손에 느껴지는 진동처럼 골전도 이어폰도 나의 귀구명 옆부분에다가 응원의 진동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걸음마다 느껴지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듯한 중력감을 이겨 내기 위해서 온 신경을 음악에 집중하며 뛰었다. 내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내가 되어 갔고,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내가 두 발로 달린 건지, 두 발이 나를 달리게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지옥(27km, 37km 부근)으로 불리는 구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며 대차게 달리게 해 준 노래 세 곡 덕분이었다. 그것은.


1. HERO - 임영웅
2. Holdin' on - 허재혁
3. 돌덩이 - 하현우(국카스텐)


  후반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바닥을 찍고 육체는 너덜너덜 해지고 인간의 나약함을 처절하게 느끼는 순간이 길어졌다.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이 턱까지 올라왔을 때 '임영웅의 HERO'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꽂혔다. 나의 영혼이 하고 싶은 말을 가사를 통해 지친 나를 독려하는 것 같았다. '나를 믿고 가 오' 이 부분이 버텨보자 버텨보자라는 생각의 불씨를 지폈다. 거센 파도의 쉼 없는 타격을 받아 내고 있는 항구의 방파제처럼, 세찬 비바람 앞에 놓인 언덕 위 소나무처럼 존버하고 있는 나였다. 이때, 더 세게 때려봐라. 그래도 난 끄떡없다고 대신 외쳐주는 '허재혁의 Holdin' on', '하현우의 돌덩이' 덕분에 쓰러지기 직전 그 순간마다 마라톤을 찢어버릴 것 같은 눈빛이 소환되어 더 악착같이 달릴 수 있었다.



나 지금 너무 뿌듯해, 고마워



  만성핑계로 인한 운동부족으로 배둘레햄이 최근 1인치 증가했고, 지금도 증가 중인 저질체력의 생계형 직장인인 내가. 최근 5개월 내 마라톤 풀코스 3회 완주했다. 세상에 나온 지 17개월째인 아들내미의 생존을 돕는 뒷바라지를 핑계로 운동량이 턱없이 부족했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22.11.6일 JTBC마라톤 4시간 21분, '23.3.1일 머니투데이마라톤 4시간 31분, '23.3.19일 동아마라톤 4시간 55분의 기록으로 피니쉬(Finish) 라인을 넘었다. 왜 그렇게 무리하게 도전했냐고? 버릿리스트에 숙성만 시키는 것은 그만하고 목표리스트로 옮겨와 실행에 옮겨 보고 싶었다. 달성하면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무식한 용기를 내어 강력한 고배를 안겨줄 대회신청을 했고 운 좋게도 완주의 맛을 보았다.





완주맛

 페레로로쉐 초콜릿 보다 달콤했고,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금메달 땄을 때와 비슷하게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완주의 자랑스러움을 느꼈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신선한 기쁨도 느꼈다. 무엇보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에 신성한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소감은요? 이 자리를 빌려 술안주 보다 맛있는 런완주의 맛을 보게 해 준 내 정신과 육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이 고통을 이겨내고 비로소 내가 받은 선물이 있다. 그것은.


뚝심

  앤절라 더크워스의 GIRT(그릿)을 읽으며 나도 책에서 말하는 그것을 갖고 싶다고 한때 다짐했었다. 내가 만약 이 책을 썼다면 제목을 '뚝심'으로 했을 거다.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더 이상 한걸음도 땔 수 없을 때 거기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힘, 끈질기게 견딜 수 있는 마음근육.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난 다짐만 했었었고 여전히 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마라톤도 양치기 소년 코스프레에서 벗어나고 싶고, 뚝심(그릿)을 갖고 싶어 도전한 거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에 곰팡이가 피는 것처럼 실천하지 않는 나의 다짐에도 곰팡이가 피어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 마라론 완주로 통쾌하게 한방에 극복되었다. 내가 달릴 수 있는 마음의 한계거리도 격파했고, 무엇보다 끈질기게 견뎌내는 몸근육, 마음근육이 쩍쩍 갈라지며 각이 잡혔다. 내 안에는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이라는 아이덴티티도 자리 잡았다. 보너스로 다음 마라톤 도전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도 도전하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도 함께 받았다. 100% 만족스러운 도전과 몰입과 성취였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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