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로지] 천하를 3분으로 나눈 한국 일본 인도 <카레 삼국지>
■ 이우석의 푸드로지 - 카레
인더스문명 시대부터 먹어
英, 인도서 들여와 우유 첨가
日, 달콤한 바몬토 카레 인기
우동·빵·고로케 등 접목시켜
한국은 강황 많이 넣어 매운맛
즉석 간편식품 내놔 ‘토착화’
네팔‘코마수’파키스탄‘파야’
각국서 입맛 맞게 재료 변형
카레는 이제 거의 토착화된 ‘외국의 맛’이다. 더 이상 카레의 맛을 낯설게 여기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고추장이나 된장처럼 저절로 향과 맛이 연상된다.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카레의 풍미다. 푸드로지 ‘향신료’ 편에서 카레를 슬쩍 언급한 적 있지만, 현대 한국인 식생활에서 카레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따로 충분히 주제로 다룰 만하다. 워낙 인구가 많은 중국의 간장 정도를 제외한다면 카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 양념(소스)이기도 하다.
인도,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 각국 카레의 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저마다 식탁에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름도 다르다. 인도 마살라(masala)가 영국으로 건너갈 때 커리(curry)란 이름을 얻었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와 카레가 되고 다시 한국에서 우리가 아는 그 ‘카레’가 됐다.
국내 식당가에도 ‘카레 삼국지’라 할 만큼 다양한 카레가 매일 식탁에 오르고 있다. 삼국지(연의)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삼분은 ‘3분 카레’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카레의 삼국지가 밥상에 펼쳐지고 있다(희한하게도 서로 한자는 같다).
전 세계를 누비며 가는 곳마다 토착화를 시킨 카레의 출신부터 알아보자. 흔히 알고 있듯 인도가 맞다. 무려 3000여 년 전인 인더스문명 때부터 먹었던 유서 깊은 음식이다. 다만 카레란 이름이 아니었을 뿐이다.
코리앤더, 큐민, 클로브, 카다몸, 육두구(넛맥) 등 여러 향신료를 조합한 양념이 마살라인데, 배합에 따라 각각 다른 맛을 낸다. 지역은 물론 집집마다 다르다고 한다. 아무튼 이것을 넣고 자작하게 끓인 스튜가 바로 커리의 원형이다. 16세기 향신료의 집산지인 인도 고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런 음식을 통칭해 ‘카릴’이란 이름으로 불렀고 이것이 커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세기 들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이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본국에 가져가게 된다. 커리(마살라) 가루에 우유를 넣어 먹기 시작한 것이 영국식 커리의 시작이다(커리를 자국 음식으로 생각하는 영국인도 많이 있다). 꽤 맛있는 데다 특유의 향이 세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고기와 해산물에도 잘 어울리는 까닭에 금세 퍼져 나갔다. 참고로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던 터라 고기의 향을 감추기 위해 향신료를 많이 썼는데 마침 들여온 커리는 안성맞춤이었다.
보관도 편하고 조리하기도 좋아 특히 배를 오래 타는 영국 해군에 급식으로 자주 나왔다.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영국과 교류하던 일본 해군도 자연스레 커리를 받아들이게 됐다. 일본 와서 고생(?)하는 모든 외국어가 그렇듯 ‘카레’로 바뀌었다.
해군 입장에선 한 솥 푹 끓여서 밥 위에 끼얹어주면 되니 급식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른바 ‘카레라이스’의 탄생이다. 날짜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토요일마다 나왔다고 한다. 의외로 입에 맞았는지 해군에서 민간으로 금세 퍼졌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본산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스카(橫須賀)시에선 지금도 ‘해군 카레 축제’를 열고 있다. 원조 ‘해군 카레 거리’도 조성돼 있다.
발상지는 인도, 전파자는 영국이었지만 카레를 급속도로 산업화한 것은 일본이다. 1926년 세계 최초로 분말 레토르트 카레를 개발한 곳은 일본 ‘하우스 식품’이다. 이후 지금도 유명한 ‘에스비 식품(S&B)’이 보관과 휴대가 편리한 고체 블록 카레를 만들었고, 1963년엔 다시 하우스 식품이 매운맛을 덜고 달콤한 맛을 더한 ‘바몬토 카레’를 출시해 대중화에 불을 붙였다.
바몬토 카레는 원래 미국 버몬트주에서 따온 이름인데, 사실 미국 북동부의 이 시골 동네와 카레는 아무 상관이 없다. 1958년 버몬트주에 살던 의사 디포레스트 자비스가 사과식초와 벌꿀을 먹으면 만병통치한다는 건강요법을 주장해 한때 ‘버몬트 건강요법’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 민간 건강요법이 인기를 끌었던 일본에선 이를 모티브 삼아 사과와 벌꿀을 넣어 단맛을 내는 카레를 개발한 것이다. 자양강장 음료 ‘구론산 바몬토’ 역시 그때 나온 제품이다. 이를 제휴해 들여온 국내 기업들은 하나같이 ‘바몬드’로 표기하고 있다.
아무튼 달콤해진 바몬토 카레 덕분에 일본에선 카레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상위권에 올랐다. 가정에선 물론이며 급식이나 행사에서 카레 메뉴가 독보적 인기를 끌었다. 일본 인기 만화 ‘심야식당’(아베 야로 작)에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메뉴로 ‘어제의 카레’가 제1권에 등장했을 정도로 1970년대 이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인들에겐 ‘추억의 맛’으로 군림하고 있다. 군대 급식 메뉴가 도입 100여 년 만에 국민 메뉴가 된 셈이다.
카레의 맛에 익숙해지니 카레 우동, 카레 빵, 카레 고로케 등 다양한 메뉴에 카레 가루를 사용하기 시작해 일본을 대표하는 양념처럼 두루 쓰인다.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즐기는 수프카레는 채소를 덩어리째 넣고 묽게 끓여낸 글자 그대로 커리 수프다. 추운 기후로 따끈한 국물을 후루룩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된 요리다.
일제강점기 한국에 상륙한 카레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매운맛과 강황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성에 맞춰 샛노란 색깔을 자랑하는 한국식 카레가 탄생했다. 즉석 카레를 처음 개발한 일본인들도 요즘의 한국식 카레 맛을 보면 의아해한다. 색도 맛도 다르다. 게다가 깍둑깍둑 썬 돼지고기와 채소를 넣어서 먹는 것도 특이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주로 양고기와 닭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넣는 인도에선 돼지고기와 어울리는 카레가 무척 생소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치는 왜 또 그렇게 잘 어울리나. 뜨거운 카레에 비빈 밥을 한술 떠서 차가운 김치 한 조각을 올려 먹으면 궁합이 그리도 좋다. 짜릿하니 매콤하면서도 각각의 서로 다른 풍미를 강하게 낸다. 인도인도 일본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맛의 조화가 한국 분식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 카레 밥은 일본 카레라이스와도 다르다. 국물을 즐기는 식문화에 힘입어 흥건한 국물 속 제대로 씹히는 건더기를 넣고 끓인다. 조금씩 섞어 먹는 일본 카레와는 달리 거의 밥을 말 듯이 비벼서 먹기 좋게 좀 더 묽게 끓인다. 다른 나라 카레 문화와 비교할 때 매운맛, 강황 특유의 향, 노란색, 돼지고기, 감자 고명 등이 특징이다. 강황에 포함된 커큐민 약효 성분을 강조하는 ‘백세카레’(오뚜기)가 출시된 것도 한국인의 강황에 대한 넘치는 애정 덕분이다.
말이 삼국지지 카레를 즐기는 문화는 엄청나게 많다. 인도와 접한 네팔과 티베트, 스리랑카 등은 물론이고 태국, 말레이시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와 태평양 섬나라, 유럽과 남미에서도 카레를 즐기는 식문화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종류도 엄청나게 많다. 1년 내내 카레만 먹는대도 똑같은 것을 두 번 먹지 않아도 된다.
종주국 인도는 가장 기본적인 게 마살라 커리다. 중부지방에서는 감자 커리인 알루 마살라를, 펀자브에서는 토마토 크림 커리인 마크니를 주로 먹는다. 마늘과 칠리가 들어가 매콤한 향이 강한 빈달루도 있고, 요구르트와 버터를 넣어 부드러운 코르마도 있다. 이 밖에도 팔락 파니르, 달, 알루 고비, 체티나두, 도피아자, 코프타, 카라히, 고슈트, 잘프레지, 마드라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카레가 있다.
인도식 화덕 탄두리에 구워낸 닭고기(치킨 티카)를 마살라에 조려낸 치킨은 영국인들이 자국 음식으로 여기는 메뉴다. 양고기를 넣고 볶아낸 ‘로건 조시’는 서양식 스타일을 좇아간 커리 메뉴. 북인도와 국경을 마주한 네팔에도 염소갈비를 쓴 카시 코마수라는 전통 커리가 있고, 파키스탄에는 매운맛의 니하리, 사골국물의 파야, 콩가루를 넣은 할림 등이 있다. 쌀 문화권인 스리랑카도 커리를 즐겨 먹는다.
‘미식 천국’으로 꼽히는 태국에서도 코코넛 밀크를 넣은 커리가 주된 양념 중 하나다. 특별히 맵거나 강렬하지 않고 부드럽고 고소하다. 메뉴에 ‘깽’이 붙으면 국물 요리인데 ‘까리(커리)’가 들어가면 틀림없는 커리 베이스다. 예전부터 페르시아와 교역했던 문물이 삶 속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말랑한 껍질의 게를 튀겨 커리 소스에 내는 뿌님팟퐁까리(푸팟퐁커리), 깽마싸만까리(마사만커리) 등이 유명하다.
요즘 정통 인도식 카레집이 많이 생겨나고 일본식 카레 전문점도 늘었지만 대대로 우리나라 분식점에서 판매해온 카레는 대부분 레토르트 가루로 만든 것이다. 비벼 먹기 좋도록 흥건한 카레 국물을 밥과 함께 오목한 그릇에 퍼담아 주는 것도 한국 카레의 독특한 방식이다. 세계적으로 카레는 램프처럼 생긴 ‘카레 보트’에 담거나 팟에 따로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가공할 만한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오뚜기 카레’는 ‘한국식 카레’의 표준 맛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식 카레는 단계별로 매운맛을 조정하거나 강황 비율을 높인 제품까지 내놓으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카레 맛의 토착화를 이뤘다. 카레 가루를 섞은 떡볶이나 닭갈비 등 다양한 응용 레시피까지 양산하며 ‘카레 삼국지’의 한 축을 유지하고 있다.
입맛 없을 때 카레 한 그릇은 마술처럼 식욕을 끌어낸다. 특히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카레에 섞인 다양한 향신료가 몸을 따스하게 한다. 가끔은 카레. 광고 카피처럼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인도 네팔식 커리 = 히말라야
인도와 네팔 음식점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히말라야란 이름을 보면 네팔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외국인이 경영하는 정통 커리 레스토랑으로 인테리어나 맛이 현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팔락 파니르, 빈달루, 마카니 등 다양한 카레에 치킨과 새우, 양고기 등을 취향껏 더해 난과 함께 맛볼 수 있다. 매운맛을 좋아한다면 빈달루, 고소한 맛을 원하면 시금치를 넣은 팔락을 선택하면 된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45-2. 1만4000~1만6000원.
◇일본식 카레라이스 = 고레카레
다양한 재료를 갈아 넣고 오랜 시간 끓여낸 정통 일본식 카레라이스 집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많은 재료가 녹아들어 그냥 먹어도 든든하지만, 소시지와 햄버거 등 토핑을 올려 씹는 맛을 더할 수 있다. 잘게 썬 파나 튀김이 기본적으로 들었다. 매운맛 조절이 가능한데 한국인은 주로 보통보다 조금 더 매운 정도를 선택한다. 같은 맛의 카레우동도 판다. 서울 중구 서소문동 85-3. 함박카레라이스. 1만 원.
◇태국식 커리=반쿤콴 비케이케이
앞서 소개한 히말라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방콕(BKK)이 있다. 태국인이 운영하는 반쿤콴은 다양한 태국 요리를 내는데 시그니처 메뉴가 뿌님팟퐁까리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게 튀김에 코코넛 밀크를 더한 커리 소스를 부었다. 게는 바삭하고 커리는 부드러워 잘 어울린다. ?얌꿍 쌀국수와 스프링롤 튀김을 묶어 점심 세트로도 판다. 서울 종로구 종로10길 20 3층. 뿌님팟퐁까리(소) 1만9800원.
◇일본 수프카레 = 시오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많이 먹는 수프카레는 우리 한식의 국처럼 밥과 함께 먹는다. 말아먹어도 좋다. 서울 연희동에서 ‘일본 가정식 음식점’을 표방하는 시오에서 수프카레를 판다. 호박과 버섯, 감자, 당근, 브로콜리 등 구운 채소를 뭉텅뭉텅 넣고 흥건하게 끓여낸 국엔 카레 향기가 물씬 풍긴다. 반상에 제공되는 샐러드 등 반찬과 함께 백반처럼 즐길 수 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가길 23 1층. 1만6000원.
◇한국 분식점 카레 = 다락방 분식
서울 시청 뒤 무교동 다동에서 이만한 가격에 만족스럽게 먹을 곳도 드물다. 다양한 분식을 파는데 한 그릇 가득 담아주는 한국식 카레가 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카레가 사발에 가득이다. 밥을 넣으면 금세 스며들어 굳이 비빌 필요도 없다. 반찬 없이도 그냥 쑥쑥 들어가지만, 이 집 김치와 궁합이 딱 맞는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9길 10.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