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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cent Dec 09. 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MMCA. Asger Jorn,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19년 5월.

MMCA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Asger Jorn. 19년 5월.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bincent_kim/ 2019. 6. 5. 0:48 작성



페로탕 갤러리의 『기념비에 대한 부정』에 이어 다시 한번 "비주류" 전시를 만나게 되었다. 서양미술사를 보면 대체로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0 페이지에 달하는 곰브리치의 책에도 동유럽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북유럽 미술이 20 페이지 남짓 있을 뿐이다.


『기념비에 대한 부정』이 남성 위주의 예술에 대한 반기를 든 것처럼 이번 전시 또한 '추상표현주의의 그림'으로만 해석되던 작품들을 사회 운동가로서의 활동으로 조명하고 주류 미술사에서 잠깐 눈을 돌려 '대안적 미술사 쓰기를 제안'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두 전시가 서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는 점이 흥미롭다.



아스거 욘의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 또는 미술사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기 보다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의 관념과 규범에 도전하고자하는 시도로 보는 것이 전시의 기획 의도에 적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전시처럼 심미적 갈증을 채운다거나 한 주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즐거운 나들이 목적으로 접근한다면 다소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관람객 역시 '주류' 미술의 '주류' 감상법에 익숙해진 탓도 있다.


배경 지식이라는 것이 편견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생소한 분야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므로 간단하게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감상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스거 욘은 1914년 덴마크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며 12살에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어린 시절 엄격한 환경 탓에 내면적 반항심을 키우게 되고 권위에 저항하는 태도를 갖게 만든다. 대학생 때 공산당원으로 가입하여 한 신디칼리스트(노동조합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사상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Asger Jorn (1963) by Erling Mandelmann


1936년 대학 졸업 후 바실리 칸딘스키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가지만 당시 칸딘스키의 경제적 여건이 매우 어려운 것을 보고 페르낭 레제의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아스거 욘은 구상주의에서 벗어나 추상 작업을 하게 된다. 1937년에는 르 코르뷔지에를 도와 파리 박람회의 Pavillon des Temps Nouveaux 새로운 시대의 파빌리온 건축에 참여하기도 한다. (위키피디아 참조)


이 정도의 정보와 함께 1939년에 제작된 전시의 첫 작품 <무제>로 감상을 시작한다면 제법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크게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1. 실험 정신 - 새로운 물질과 형태


2. 정치적 헌신 - 구조에 대한 도전


3. 대안적 세계관 - 북유럽 전통



각각의 테마는 시대순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병렬적으로 이번 전시의 기획 목적을 보여준다. 마치 전시 마지막에 볼 수 있는 삼면축구와 같은 느낌이다. 이런 부분에서도 기획자의 많은 고민과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 실험 정신 - 새로운 물질과 형태


'실험 정신 - 새로운 물질과 형태'에서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테피스트리, 토기, 석판화, 동판화, 유화 등 다양한 재료와 구조의 작품이 등장한다. 욘이 이렇게 여러 가지 시도를 했던 이유는 아래와 같은 사고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공산당 활동 이력 → 2. 예술 또한 공동체적 경험으로 간주 → 3. 개인 창작품 또한 사회 환경과 연관됨 → 4. 독창성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인간의 천재성을 저해하는 직접적 방해요소 → 5. 예술가란 다른 예술가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최대한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인 고유의'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 → 6. 예술은 하나로 정의될 수 없으며 언제나 지속적인 변화를 필요로 함.


(출처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의 예술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주원)


나는 특히 5번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다. 독창성이 개인주의적이라 경계해야한다고 말하면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개인 고유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상) The Bird in the Woods, 138 x 257cm, 1946-1947

(중) The Golden Sands, Tapestry, Wool, 124 x 193cm, 1957-1958

(하) Untitled, Tapestry, 82 x 164cm, 1960, Museum Jorn collection (Collaboration with Pierre Wemaëre)


사전에 따르면 '독창성'이란 모방이나 파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성과 고유의 능력에 의해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을 접해오며 느꼈던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아스거 욘은 이러한 '자기 개성과 고유의 능력에 의해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부정하면서 '개인 고유의' 예술을 만들어 낼 것을 역설한다.


박주원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욘은 앞서 말한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서 "작품 구성의 '전환'(détourment)을 시도하는데, 이는 고전주의적 관념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욘은 "우리의 과거는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껍질을 깨고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독창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좌) The Flower Eater, Oil on Canvas, 59.9 x 50 cm, 1939

(우) Untilted, 40.2 x 30.2cm, 1940, Museum Jorn collection



욘은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호안 미로 등 초기 추상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는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장난스러운 형태,  빨랑, 초록, 노랑, 보라와 같은 단순한 색감들에서도 드러난다. 우중충한 배경만큼은 작가 본인의 색깔이 나타난 듯하다.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개성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Wassily Kandinsky, Untitled, Watercolor, Gouache and Crayon on Paper, 23 x 34cm, 1916

(좌) Joan Miro, Ciphers and Constellations in Love with a Woman, Gouache and Watercolor with Traces of Graphite on Ivory, Rough Textured Wove Paper, 45.6 × 38 cm, 1941

(우) Paul Klee, Red Balloon, Oil on Muslin Primed with Chalk, 31.8 x 31.1cm, 1922



정말 오랜만에 오디오 가이드를 들었는데 조금은 얕은 듯 했다. 부담을 갖지 않도록 작품에 대한 설명을 담백하게 한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만큼 가볍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쏭달쏭한 그림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는 도중,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던걸까요?"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 답을 찾는 건 관객 여러분의 몫입니다."라고 하다니... 목소리에 좀 얄미운 장난기 마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작품의 해석은 관객에게 맡겼으니까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마세요~ 정답도 오답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뒤로 갈수록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간결하게 담은 내용이 쉽지 않은 전시에서 많은 힘이 되었다.


Ulysses, Oil on Canvas, 49 x 44.3cm, 1940 / Untitled, 35.5 x 50.5cm, 1939, Museum Jorn collection




(상) Colour Plastic, Painted and Gold Plated Foam Plastic, 46.5 x 37cm, 1971

(하) The Prostitute from Normandy, Tapestry, Wool, 39 x 97cm, 1948, Museum Jorn collection


두 번째 테마 '정치적 헌신 - 구조에 대한 도전'은 국경을 넘어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추구하고 기존의 제도와 사회 구조에 도전하고자 했던 작가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정치적 헌신 - 구조에 대한 도전



Night Feast, Oil on Canvas, 119.5 x 162,5cm, 1945, Museum Jorn collection



이번 섹션은 크게 '코브라'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두 가지로 나뉘는데 '코브라'는 1948년, 동료들과 설립한 그룹이다. 그들이 활동하던 COpenhagen, BRussel, Amsterdam 세 개 도시에서 이름을 땄으며 "예술의 국제적 연대와 창의성에 바탕을 둔 문화에 대한 실험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코브라'는 3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나 그 기간 동안 "예술적 창의성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대안적 문화에 대한 다양한 작업을 실행했다.


CoBrA Library, 각 16.7 x 12.4cm, Museum Jorn collection


The Eagle's Share II, Oil on Masonite, 74.5 x 60cm, 1951, Museum Jorn collection


작가의 말에 따르면 "때로는 상상의 생명체들의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원초적인 본능을 통해 사람들 간의 근본적인 갈등을 표한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짐승"이라고 표현한 기괴한 모습의 동물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기에 드러난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다." 


The Golden Swine: War Vision, Oil on Canvas, 50 x 100cm, 1950, Museum Jorn collection


특히 세계 경제가 본격적으로 호황을 맞기 시작하며 자본주의 개념이 대두되었던 시기에 그려진 위 그림에서는  검붉게 표시된 달러 기호와 그와 같은 색으로 표현된 흐리멍텅한 눈동자, 탐욕스럽게 삐져나온 아랫턱, 여백도 없이 꽉 들어찬 동물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짙은 비판을 느낄 수 있다.


이후 1957년, 초기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동료들과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그룹을 만들었고 조금 더 깊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 대한 예술적, 이론적 비평을 실천함과 동시에 새롭고 다양한 구상을 묵살하는 예술의 차용 및 상업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룹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상황주의자'의 상황이라 함은 "예술적 실천", 예를 들어,  도시를 어슬렁 거리며 걷기(표류), 앞서 언급했던 새로운 관점으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것 (전환), 관객 참여 유도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터내셔널은 말 그대로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으며 굳이 해석을 하자면 국제 기구, 거창함을 조금 빼서 국제 모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라는 것은 예술적 실천을 통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좌) Unforeseen Atomizing, Oil on Canvas, 130 x 97cm, 1957-1958

(우) The Priest at the Beach, Oil and Laquer Color on Canvas, 140 x 104cm, 1958, Museum Jorn collection

Untitled, Collage, Paper, Crayon, Silver Plated, 53.6 x 41.1cm, 1956, Museum Jorn collection


1964년 구겐하임 수상 거부는 아스거 욘이 언행일치를 너무나도 잘 했음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다. 구겐하임 재단은 1937년 설립되었으며 뉴욕, 빌바오, 아부다비, 베니스에서 유수 현대미술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구겐하임 어워드는 비록 1956년부터 1964년까지 4회에 그쳤지만 1958년에 호안 미로가 수상하고 1964년에도 장 뒤뷔페, 윌렘 데 쿠닝, 후안 미로 등 쟁쟁한 작가들이 후보에 올랐으며,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수상한 의미있는 상이다. 아스거 욘은 1등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며 다섯 명의 2등 작가들 중 하나였다.


구겐하임 미술관 보도자료, 아스거 욘의 편지, 요스거 욘과 구겐하임 미술관 간 전보, 1963, 1964


욘의 논지는 "구겐하임상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체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착취이며 자신은 상을 달라고 한 적도 없다며", "그 돈 가지고 지옥에나 가라. 상금을 거절한다. 상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나는 품위 없는 작가들에 반대하고 당신의 홍보에 협조하는 그들의 의지에 반대한다. 당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시합에 내가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길 바란다."고 아주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사회부적응자'였다. 소신 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기 보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꼬였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반하는 행위에 대한 반박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저런식으로 무례하고 투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같은 해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다. 시상이 서구 작가들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과 문학을 평가하고 서열을 매기는 것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경쟁자이자 친구였던 알베르 카뮈가 7년 전 최연소 나이로 문학상을 받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소문도 있었고 앙드레 브르통은 공산권이었던 동구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거부했다는 주장도 했었다. (출처 : 노벨상 오디세이 30 : 노벨상을 불명예로 여긴 작가 2018.03.16 ⓒ ScienceTimes)


어쨌든 아스거 욘이 지독하게 거부했던 구겐하임 어워드에서 자코메티가 수상하고 몇 개월 뒤 자코메티의 절친인 사르트르는 욘과 비슷한 이유로 노벨상을 거절한 것은 참 웃기면서도 묘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을 대하는 '전환' 개념이 욘의 작품 전반에 스며있는데 이는 '수정(Modification)'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작업물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아래 왼쪽 그림은 이번 전시의 홍보에 주로 사용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이는 여인의 초상화에 낙서에 가까운 수준의 덧칠을 함으로써 작품 속 인물을 새대가리로 만들어 놓았다. unfinished라는 말이 제목에 있는데 더 망가뜨려놓을 것을 좀 봐준 듯한 느낌도 든다.


우측에는 공작 깃털 같은 부채를 들고 목걸이, 팔찌를 주렁주렁 찬 귀부인을 징그러울 정도로 땅딸보처럼 묘사했다. 거기다 얼굴은 턱부터 잡아 당겨놓은 듯이 기괴하게 늘어져있고 부채는 멍청한 코끼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그려놓았다. 제목은 달콤한 인생.


욘이 시도한 새로운 서사와 가치라는 것이 부르주아에 대한 무차별한 비난과 저항이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좌) Untitled (unfinished disfigurations), Oil on Canvas (modification, older painting double frames), 122 x 97cm, 1959

(우) The Sweet Life II, 100.5 x 81.5cm, 1962, Museum Jorn collection


(좌) Secular Virgin, Oil on Canvas (modification, older painting double frames), 81.5 x 51cm, 1960

(우) Exotism: Extreme Orientation, 61 x 50cm, 1959, Museum Jorn collection



버려진 그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케니 샤프의 BORN AGAIN 작업물과는 대조적이다. 정치색이 없어서인지 샤프의 그림에서는 순수하게 "낡은 회화를 몇 번의 붓질로 현대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새로운 서사"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욘의 '수정'에서는 인상이 찌푸려지거나 무서운 느낌이 들고 그래서 훨씬 무겁게 다가오며 '자본주의가 나쁜 것인가,' '예술에 순위를 매기면 안되는가,' '성스럽다는 개념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등등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작품의 의도 측면에서 그 목적을 잘 달성한 것이다. 



(좌) Kenny Scharf, Rucan Springs, Oil on Found Painting, 85 x 115cm

(우) I Love Hawk, Oil on Found Painting, 52 x 62cm, 2014


한 뜻으로 설립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시각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지게 된다. 욘이 예술이라는 매개는 "언제나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 반면, 창립자들 중 하나인 기 드보르를 비롯한 다수의 멤버들은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판해오던 예술의 상업화를 촉진하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1961년, 결성 4년 만에  그룹을 떠나게 되지만 활동을 꾸준하게 지원한다.


(우상) Smash the Frame That Stifles the Image,

(우하) Support the Students Who Should Study and Learn Freely,

(좌상) Long Live the Passionate Revolution of Creative Intelligence,

(좌하) No Power of Imagination without Powerful Images, Lithogrphy, 49.5 x 31.5cm, 

1968, fluid archives collection


아스거 욘은 정치적 활동과 예술 활동이 별개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68년 프랑스 혁명에서도 나타난다. 68혁명은 권력과 국가에 저항하여 일어난 학생 봉기이자 노동자 파업이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심지어 미국, 남미,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진보적인 가치에 대한 대명사가 되었다. 위 포스터들은 시위를 지원하기 위한 욘의 작업들이다.


영화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003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을 떠난 아스거 욘이 같은 해 '스칸디나비아 비교 반달리즘 연구소'(SICV)를 설립힌다. 뭘 설립하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서 소개된 것 외에도 코브라 해체 후 실험주의 예술가 집단인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 운동'(International Movement for an Imaginist Bauhaus)을 주도하였고 후에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이라는 예술공동체를 꾸리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아스거 욘은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안에서 끓어오르는 독창적인 (본인은 독창성을 방해 요소라고 했지만) 아이디어들을 주체할 수 없어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실천력도 갖추었던 것 같다. '인터네셔널,' '운동,' 종합,' '연구' 등 그가 조직한 단체 이름의 키워드들만 보아도 그가 생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보인다.




마지막 테마는 '대안적 세계관 - 북유럽 전통'으로 스칸디나비아 전통 연구, 북유럽 민속 예술 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예술적 사색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지 위한 '스칸디나비아 비교 반달리즘 연구소'(SICV)에 관한 것이다. 


3. 대안적 세계관 - 북유럽 전통


전시 설명에 따르면 "욘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동안 남유럽 전통이 북유럽 문화를 한정적이고 지역적인 민속예술로 평가절하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만년의 역사가 축적된 북유럽 문화는 기독교 성경을 기반으로 한 문자 중심의 남유럽 문화와 달리, 야만적이고 행동 지향적이며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고유 문화라고 보았다. 또한 욘은 이러한 북유럽 전통 연구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인 고전 문화를 해체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이해를 제안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듯이 현대에  『기념비에 대한 부정』이 남성 위주의 예술에 대한 반기를 든 것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이 주류 미술사에서 잠깐 눈을 돌려 '대안적 미술사 쓰기'를 제안한 것처럼, 아스거 욘 또한 남유럽 미술 중심의 지배적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지 중심의 행동지향적인 북유럽 문화가 솔직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대안적 세계관이라고 생각했다. 



아스거 욘은 『북유럽 민속예술의 1만 년』이라는 제목으로 32권을 출판하려했던 계획에 걸맞게 5년 간 스칸디나비아를 돌며 2만 5천여 장의 사진을 남지만 정작 1권을 완성 후 세상을 떠난다.  그 아카이빙의 일부를 전시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옆 전시실로 가면 세번째 테마의 연장선인듯, 전시를 마무리하는 느낌의 번외편인듯, 조금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난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으로 빡빡하게 느껴지고 어두운 조명 탓에 무거운 기분을 받았다면 마지막 공간은 밝고 그림들도 듬성듬성 걸려 있어 환기가 되는 듯하다.



계속되는 아카이빙과 아스거 욘의 사상이 깃든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작품을 옮겨온 박스들이 전시장 가운데 턱턱 놓여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Euphorisme, Oil on Canvas, 81 x 65cm, 1970 / Poor man, 73.2 x 61cm, 1966, , Museum Jorn collection

(좌) A Bridal Couple, Oil on Masonite, 50 x 41.3cm, 1953

(우) Untitled, Oil on Canvas Mounted on Masonite, 64 x 54cm, 1956, Museum Jorn collection




전시의 정말 마지막 순서는 '삼면축구'라는 설치 작품이다. 1960년대에 고안한 경기인데 두 팀이 아닌 세 팀이 하는 게임이다. 규칙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끼리 협의해 나간다. 실제 경기를 하는 퍼포먼스는 욘이 세상을 떠난 뒤인 "2000년대에 들어 세계 각국에서 그들이 당면한 사회, 정치적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이루어졌다. 세상이 이원적인 대립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론적 기반이 마음에 든다.


요즘 세상은 부자와 거지,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젊은이와 늙은이, 두 파로 나누어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로 인정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까진 아니더라도 헐뜯고 욕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소모적인 대립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욘은 자신의 저서에서 "참여자가 두 명일 경우에는 늘 공격적인 성향을 띠고, 세 명일 경우에는 방어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고 설명하는데 우리 사회가 서로 지지고 볶는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욘은 5,60년 전부터 그러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번 리뷰는 유독 힘들었다.


곱씹고 찾아볼수록 생각할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그림 자체보다 예술, 예술보다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 또 그것보다는 인간 자체를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의 작업물에 대한 리뷰라 그랬던 것 같다.


아스거 욘의 초상, 1938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멋있다.



#아스거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파울클레 #칸딘스키 #구겐하임 #케니샤프 #몽상가들 #AsgerJ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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