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의 그랜드 투어'파리통신'
김환기 화백은 아마 한국 근대 작가 중 가장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좋은 곳들에 작품이 걸려있기도 하고 기사로 해외 유명 옥션에서 최고가로 판매되었다는 내용들이 종종 알려지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오히려 유영국,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같은 작가들보다 뭔가 친근하게 느껴지진 않았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큰 규모의 개인전을 접하지 못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진 사람에 대해서는 굳이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는 치기인지는 몰라도 왠지 가깝고도 먼 작가였다.
그래서 이번에 전시 소식을 듣고 좀 멀긴 하지만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다 '파리통신'이라는 부제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에서 작가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녹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했다.
예상했던 대로 가는 길이, 특히 주말에는 더욱, 녹록하진 않았다. 주말 오후의 전쟁 같은 양재 IC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명동이라는 벽을 넘고 나면 마침내 경복궁 돌담길을 끼고 고즈넉한 효자동이 나온다. 이곳은 주말에도 차가 그렇게 많이 다니는 곳도 아니고 워낙 조용하고 운치가 있어 좋다.
미술관은 총 세 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관, 별관, 수향산방이다. 본관에서는 전시, 별관은 카페테리아와 소규모 전시, 수향산방은 강의실 중심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본관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 섹션은 김환기 화백이 195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때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아카이브와 드로잉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시절의 작업실, 그가 걷던 거리들, 수필, 파리의 지도 등을 볼 수 있다. 드로잉 작품들도 작가가 대작을 그리기 전 어떤 아이디어와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지 거칠게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자동으로 넘어가는 수필 스캔본에 우연히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재미있었다. 나이 50에 돋보기를 쓰는 것이 못내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며 피카소도 돋보기를 결국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피카소를 자신의 강적이었다고 소개하는 부분에서 그의 포부와 패기가 느껴진다. 이런 기백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힘이 있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글에서는 수필가가 아님에도 예술가 특유의 멋스러움, 자조, 유머, 낭만이 한 데 어우러져있다. "1시고 2시고 3시고 간에 우장외투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 꼬냑 서너 잔 하고 강을 따라 걸어 나가면 섬에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육지의 파리는 꽃수레같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맘때가 되면 장 자크 루소가 살던 거리 강둑에 앉아 고로와즈를 연이어 피우던 생각이 난다." (김환기, 『그림에 부치는 詩』)
별 얘기도 아닌데 읽다 보면 소슬바람이 부는 어슴푸레한 강가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를 조금 상기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조금 수척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정작 작가는 이런 향수가 낭만이나 감상이 아니라 치열했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지만 지금 와서 그 모습을 그려보는 나에게는 그게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다.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1950년대의 유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층 드로잉에서 볼 수 있었던 매화, 사슴, 항아리, 새, 산수와 같은 오브제들이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되었는지 느낄 수 있다.
김환기 화백은 파리에서 지내며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는 '시정신(詩精神)'을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참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 생각이 아름답고 표현이 아름다웠다. 여기서 노래라 함은 그 작가의 가치관일 수도 있고, 작가의 인생철학일 수도 있고, 그냥 우리가 평소에 편하게 흥얼거리는 노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예술에는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이 녹아 있으며 그것을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김환기의 '시정신(詩精神)'은 이러한 생각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보다 보면 잔잔한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는 박서보, 정상화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번뇌와 수행이나, 이우환 화백의 작품에서 느껴진 거대한 자연의 힘과 같은 것과는 조금 다른, 조용하고 서정적인 한국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3층에는 1960-70년대의 대작들 위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아마 이 작품을 실제 크기로 본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이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를 할 때 본 것 같기도 한데 아마 이 정도 사이즈는 아니었을 것이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붉은색, 오른쪽에는 파란색 작품이 있는데 그냥 보자마자 스케일에 압도되어 걸음을 멈칫하게 한다. 작품의 제목은 김환기 화백의 친구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염두에 두고 그린 듯하다. 하지만 작품을 가만 보고 있으면 무수한 점들과 푸른 빛깔, 그 속의 흐름, 명암들이 마치 일렁이는 바다 같기도 하고 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는 수풀 같기도 하다.
또한 내가 지금껏 살면서 스쳐간 사람, 좋았던 인연, 행복했던 시간,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맞을 재미있는 일들, 헤쳐나가야 할 시련 등 내 인생이 녹아있고 나아가 이 세상이 녹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작품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런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파도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와닿기도 하며, 어릴 때 살던 곳의 자동차 매연 냄새가 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그림'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예술로서의 매력이 듬뿍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층에 있던 다른 작품들이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할 정도의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전시를 다녀오면 사진을 보고 도록이나 브로셔를 다시 보면서 되짚어보고 떠올려보고 궁금했던 것을 다시 찾아보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는 사진 찍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조금 아쉬웠다. 특히 감명 깊게 보았던 작품들을 그냥 그 자리에서 보고 그 후로는 다시 떠올릴 수 없다는 것도 안 좋다.
하지만 김환기 화백의 작품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였고 작가의 삶에 대해 전보다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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