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퇴근이 기다려지기 마련이지
작년 말 동유럽 여행을 다녀옴과 동시에 백수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올해 2월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5년 전 다녔던 회사라 건물 자체는 낯설지 않았지만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사람과 일을 하려고 하니 스트레스가 엄청 났다. 첫 출근 한달 동안 살이 많이 빠져서 보는 사람마다 먹을 것을 챙겨주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적응을 잘 끝내서 살이 다시 붙었다) 화~금 주 4일만 일을 하지만 목금은 거의 밤을 새는 스케쥴이다. 그래서 금요일 모든 일이 다 마치고 퇴근하는 그 시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모든 직장인이 이런 마음이겠지만.
일이 좀 익숙해져서 금요일 밤 9~10시쯤 퇴근을 하게 되는데 그 시간에 집으로 가는 게 뭔가 내 청춘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19가 없던 시절이었다면 아마 여행을 떠났었겠지만 현실은 어디든 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회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산책을 가는 코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광화문을 가려면 162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이 버스는 생각보다 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밤에 사람이 몇 명 없는 조용한 버스를 타고 마치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가는 그 길이 참 좋다. 이날은 아마 RM의 모노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밤에 퇴근할 때는 보통 그 믹스테잎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노래 참 잘 만들었다. '저런 재능이 있는 삶이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조계사 정류장에 도착한다.
조계사 밤 산책을 하다보면 그 주에 있었던 안 좋았던 일들이 다 잊히는 것 같다. 바람 소리와 연등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 그리고 향 냄새가 위로가 된다. 이렇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인지 불교는 아니지만 절에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
잠깐의 산책 후에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사실 나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이런 멋진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실 자동 카메라로 야경을 찍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고는. 조금만 흔들려도 사진을 망치기 일수니까. 근데 있잖아, 망쳤다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흔들렸다고 해서 다 망한 사진은 아니지 않을까. 셔터를 누를 때 '아 망했다-' 하고 생각한 순간이 막상 현상을 하고 나면 멋진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 슬픔이, 이 고통이, 이 우울함이 분명 나쁜 결과만을 초래하지는 않을 거다.
퇴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이런 멋진 풍경을 보며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다독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치만 퇴근 후에 여행을 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것도 매번 보려니 지겨울 것 같으니.
이번 주도 고생했다.
camera : Leica minizoom
film : Kodak gold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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