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정확히는 물에 뜨는 법 조차 모른다.
짭조름한 바다도 좋아하지 않고 계곡 같은 곳도 다양한 곤충이 존재하는 산에 있다는 점 만으로 나에겐 마이너스 점수권이다. 이렇게 보면 물을 싫어하는 거 같지만 어쩐 연유인지 목욕하기는 참 좋아한다.
일본에 와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일본의 목욕 문화였다. 덕분에 작은 원룸이라도 욕조가 설치되어있고 다양한 입욕제가 한국보다 저렴하게 팔리고 있어 쉽게 목욕을 즐길 수 있다. 넣으면 우유 같이 불투명해지는 입욕제, 탄산 입욕제, 거품 입욕제, 목욕 소금 등등 내 방 욕실 앞에 여러 입욕제를 가득히 쌓아두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가 집에 쌀이 아주 많이 있으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덕분에 일본에 와서부터의 나의 목욕이란 이런저런 입욕제를 시험하며 핸드폰으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는 행위이다. 드라마를 보거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중에 제법 긴 시간 동안 물에 잠긴 채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은 목욕을 마치고 핸드폰을 보니 배터리가 평소보다 많이 닳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하고 보니 이어폰 때문에 켜 뒀던 블루투스가 계속 켜져 있었다. 주인의 의지가 아닌 단순한 깜박함 만으로 내 핸드폰은 존재하지 않는 페어링 기계를 배터리를 써가며 열심히 찾고 있던 것이다. 핸드폰에게 블루투스 페어링은 몇 번째 우선순위였을까. 주변에 페어링 할 기계가 없음에 절망했을까. 화면 가득 비치고 있는 내 얼굴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는 핸드폰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우선순위로 삼고 있는 것들이 자의로 입력한 우선순위가 맞을까. 너무나도 평온하고 평범한 어느 하루에 불쑥 찾아온 답 없는 질문에 나는 끝을 모를 내 속을 가만히 뒤적뒤적 헤쳐본다. 사랑받고 싶던 나,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던 나, 도움이 필요하던 나, 도움을 나누던 나, 한 없이 든든하던 나, 먼지 같이 흩날리는 나.
셀 수 없고 세고 싶지 않은 '나'가 내 속에서 꺼내져 나온다.
그 속에서 내가 해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단어들을 내가 가만히 쳐다본다.
뭔가를 아셨던 건지 석사 때 여러 가지 인연이 닿아있는 교수님은 '내가 남편보다 졸업이 1년 늦었었거든. 그때는 그게 뭐라고 강박처럼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너무 힘들었었는데 조금 지나서 보니 졸업을 좀 더 늦게 하거나 포닥을 좀 더 길게 했어도 좋았을 거 같더라고.'라고 박사 과정 1년 차였던 내게 조언을 해주셨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이자 우선순위인 '졸업'이란 게 무엇일까. 졸업이라는 우선순위가 내 자의에 따른 우선순위일까.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만약 지구가 일 년 뒤와 같이 일정 시간 뒤에 사라진다면 나는 무얼 하려고 할까. 일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구매해야겠다. 내 가족과 같이 있으면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저녁노을이 예쁜 날이면 강아지를 데리고 집 근처를 타박타박 산책하겠지.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태어나 무한히 살 거 같은 태도로 유한한 삶을 살며 정해진 혹은 정해놓은 우선순위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내가 시한부의 지구 위에서의 삶 중에 제일 하고 싶은 것들은 아주 평온하고 평범한 어느 하루를 가족과 행복하게 보내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졸업'이 사회적 우선순위라는 손가락에 눌린 블루투스 버튼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8살 고사리 손으로 엄마손을 꼭 잡고 가던 초등학교부터 우리는 나이에 맞춰 진학하고 졸업하고, 취업과 결혼같이 일생에 정해져 있는 커다란 퀘스트를 클리어해 간다. 도태되거나 해내지 못하면 돌아오는 곱지 못한 시선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 이 룰이 똑같이 적용되고 있어서리라.
나는 내 손가락으로 내가 소유하지 못했지만 눌려있는 졸업, 취업, 결혼과 같은 명사들과 날씬하다, 예쁘다, 여성스럽다 같은 형용사들이 눌려있는 사회를 향한 블루투스 버튼을 끄기로 정했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또 내가 아끼고 나를 아끼는 모두가 충전시켜 준 나라는 내 배터리를 이렇게 소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회에 페어링 하려고 노력하느라 고생한 내 배터리에게 오늘은 새로운 입욕제와 시원한 과일 쥬스 한잔을 줘야겠다. 계속 블루투스를 켜놔서 미안해,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