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밤공기가 유난히 좋은 계절이면 예년 같았으면 금요일 밤은 으레 피자 굽는 날이었다. 사워도우 반죽을 발효시켜 납작하게 잡아당기고 화단에서 갓 따낸 허브를 솔솔 뿌려 올린다. 누구든 이 집을 찾는 사람과 계절을 나누고 잔에 찰랑거리는 와인처럼 웃음이 번진다.
차갑게 식힌 화이트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는 순간 향긋한 꽃내음과 과일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500도의 오븐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치즈와 빵을 구우며 참을 수 없는 향기로 혀를 유혹하고, 와인은 한 모금, 두 모금, 그렇게 병이 하나둘 속이 비고 가벼워진다. 곧 누군가는 부엌에 침입해 찬장을 열고 냉장고를 뒤지며 또 다른 병을 찾는다. 밤은 그렇게 다음날로 넘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무렵. 간신히 눈을 뜨고 창밖을 본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따갑게 내리쬐고 정원은 어제의 열기만큼이나 적막하다. 남은 음식, 더러워진 접시, 반쯤 비워진 잔, 흐트러진 와인병들이 널브러져 있다. 파리들은 윙윙거리며 그들만의 잔치에 바쁘고 나는 후회한다. 왜 또 이렇게 됐을까. 조금 일찍 마무리했으면, 적당히 정리하고 잤더라면.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다니.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였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튤립 투기의 광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전, 무역으로 세계의 부가 몰려들던 암스테르담, 그 화려한 시절 한복판 어딘가쯤. 수로를 따라 늘어선 4층짜리 고급 주택에 살던 상인들의 집에도 사람들은 드나들고 부엌에서는 흘러나오는 버터와 향신료가 어우러진 냄새가 골목 너머까지 진하게 퍼졌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티클 없이 새하얀 리넨 식탁보가 화려한 요리를 기다리고 찬장 속 고급 식기가 하나둘 등장했겠지.
하지만 그들에겐 다음 날의 피곤한 정리는 걱정거리조차 아니었다. 아무리 늦게까지 떠들고 마셔도 아침이 오면 식당은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을 테고 집주인은 하인들의 손길 덕분에 손끝 하나 적시지 않고 또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손님들이 떠난 뒤 집주인은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 같은 자그마한 크기의 그림 수십 점이 옆벽을 장식하고 있는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침실 벽에는 좀 더 큰 크기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그림과 분위기가 비슷한 작품이 하나 있어 눈에 띈다. 가로 약 2m가량 되는 이 대형 회화는 나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비롭고 육감적이다. 아마도 구약 성서에서 나체 여성을 그리기 위한 구실로 활용하기 좋은 밧셰바 아니면 수산나 이야기를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주제 면에서 침실에 두기 좋은 이 그림은 크기나 전반적인 숙련도로 보아 적어도 최고급 장인 1년 연봉에 해당되는 비용인 500 길더 이상은 지불하고 구입했을 것이다.
주인이 우아한 방에서 침대에 누울 채비를 하는 동안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하인들은 조용히 그러나 분주히 움직이며 테이블 위 흔적을 지운다. 남은 굴은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같은 만찬이 된다. 그들은 부지런히 쟁반과 유리잔, 도자기 그릇을 정성껏 씻고 광이 나도록 닦는다. 유리, 주석, 은, 도자기, 그 반짝이는 질감들은 질서 정연히 진열장에서 제자리를 찾고 리넨은 다시 새하얗게 변신할 준비를 한다. 진열장 옆 벽난로 위에도 크기가 제법 큰 그림 몇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집의 부와 세련된 취향은 집을 방문하는 손님뿐만 아니라 집 앞 수로변을 지나는 행인들의 눈까지도 즐겁게 한다. 1층 길가 쪽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실히 일했고, 동인도회사 주식의 가격 상승으로 최근 더 많은 돈을 벌어 이곳 최고급 주택가로 이사 올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충실한 칼뱅교도로서 자신들의 삶을 하나도 숨길 게 없이 결백하다고 믿었기에 밖에서도 집안이 들여다보이게 하고 산다. 물론 이 지방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하듯 말이다. 크고 작은 그림과 조각, 진귀한 수입품, 이국적인 식재료, 이튿날 걱정 없는 여유로운 파티, 이 모든 건 집의 주인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은, 유리, 주석, 리넨, 비단.
소금, 레몬, 후추, 식초, 굴, 빵, 와인.
반짝이고, 투명하고, 광택 나고, 매끄럽고, 부드럽고, 미끈하고,
때로는 거칠고, 딱딱하고, 물컹하고, 촉촉하고, 울퉁불퉁한.
고소하고, 시큼하고, 짭짤하고, 바다 냄새가 나고, 어쩐지 달콤한.
화려했던 밤의 잔치는 끝났고,
사물들만이 고요 속에 남았다.
이런 그림을 ‘정물화’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Still Life. 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생명 없는 존재들, ‘정지된 삶’을 그린 그림이다. 그 기원은 멀리 고대 로마의 폼페이의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지만 그 위상은 하찮기만 했다. 17세기에 유럽 곳곳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생기면서 회화 장르의 위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가장 고귀한 장르는 역시 신화나 성경 이야기를 다룬 역사화였고, 그다음이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그리고 가장 하위에는 여전히 과일이나 빵, 접시 따위를 그린 정물화가 있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정물화를 그리는 데는 역사화만큼 고차원적인 지식이나 화면의 구성에서의 창의성이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과일과 빵 쪼가리, 광나는 접시와 투명한 컵, 주름진 식탁보를 그린 그림이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 십자가 처형 장면이나 아니면 플랑드르의 루벤스가 그린 그리스 신화 이야기보다 더 제작하기 까다로울 이유가 있겠나? 정물화에는 대의(大義)도, 영웅도, 신도 없다. 구원도, 권력도, 서사도 없다. 오직 사물만이 있다.
빛을 반사하는 유리, 식탁보의 주름, 한입 베어 문 빵, 쓰러진 와인잔, 조용히 말라가는 레몬. 일반적으로 화면은 작은 편이었고, 모든 회화 장르 중에서 가격은 가장 저렴했다. 렘브란트의 역사화 한 점이 숙련된 장인의 2년 치 연봉이었다면, 잘 그린 정물화 한 점은 며칠 일한 품값이면 살 수 있었다. 심지어 가격이 하급 장인의 하루치 품값 정도인 그림도 많았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왜 하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 시기 그곳에서, 이 ‘하찮은’ 정물화가 그렇게나 많이 제작되었을까? 왜 먹다 만 음식이나 그릇 따위를 그린 그림들이 시대를 초월해 우리를 매혹시키는가? 그리고 왜 그 많은 정물화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암시하고 있는 걸까?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가면, 1635년 빌럼 클라에스 헤다가 그린 정물화를 만날 수 있다. 스타 정물화 전문 화가였던 그는 당대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장 하위로 취급되던 이 장르에 집중하여 식탁 위의 사물 하나하나를 찬란하고 관능적인 존재로 되살려냈다. 그것들은 정적 속에서 우리를 빛나던 물질의 세계, 한때 존재했던 삶의 찰나로 데려간다.
화면에는 북해에서 갓 잡아온 듯한 굴이 특유의 물컹한 질감을 머금은 채 놓여 있고, 가장자리가 마른 먹다 남은 빵은 바삭하고 고소한 향으로 유혹한다. 테이블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칼 손잡이는,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에 걸쳐진 빵 접시와 함께 우릴 향해 속삭인다. “어서, 이 만찬에 참여해요”라고.
굴 접시 뒤편에는 베니스에서 제작된 유리그릇인 ‘크루앳’이 놓여 있다. 아마도 굴을 먹을 때 곁들일 식초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옆에는 은으로 만든 정교한 소금통이 보인다. 음각으로 새겨진 표면은 마치 손끝으로 만지면 오돌토돌한 촉감이 느껴질 듯 묘사되었고, 그 섬세함은 이 식탁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교양과 안목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문득 식탁 위에 이렇게 크고 장식적인 소금통이 왜 필요했을까 싶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소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생선과 고기를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생존의 자원이었고 동시에 청어를 소금에 절여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는 어업과 무역의 핵심이기도 했다. 소금의 귀중함은 금에 비견될 정도였기에 소금을 담는 용기 역시 단순한 식기의 범주를 넘어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사치품이 되었다. 굴 접시 앞의 또 하나의 쟁반 위에는 돌돌 말린 종이에서 으깨진 후추 알갱이들이 흘러나와 흩어져 있다. 이 역시 아시아에서 수입된 고가의 향신료였다.
초록색 유리잔, ‘뢰머(roemer)’도 눈길을 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이 잔은 손잡이 부분에 돌기가 있어 미끄러지지 않게 만들어졌다. 그것의 표면에 반사된 섬세한 빛, 창문 너머 들어오는 빛은 화면 너머 또 다른 공간까지도 암시한다. 평면 위에 창조된 세계는 입체적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길게 껍질이 벗겨진 레몬이 있다.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레몬은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로, 그 매끄럽고 반투명한 과육과 복잡한 곡선은 화가의 기술을 과시하기 좋은 도전 과제였다. 동시에 레몬은 이국적인 과일이자 사치품으로, 당시 중산층의 부를 상징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엔 아름다워도, 입에 넣으면 씁쓸하고 시큼하기만 하다. 그래서 정물화 속의 레몬은 욕망의 유혹과 그 이면의 허무함을 동시에 상징하게 되었다.
굴, 소금, 후추, 레몬, 빵, 와인—잘 차려진 식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사물들은 단순히 남겨진 잔해가 아니다. 베니스 산 식초병, 은제 소금통, 흩어진 후추 알갱이—이 모든 것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과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취향과 성공을 상징한다. 더 이상 왕도, 미술 후원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던 가톨릭 교회도 없는 이 네덜란드 공화국을 이토록 부유한 강국으로 만든 건 바로 건실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한 세계의 의미를 사물 하나하나에서 찾고자 했고 이러한 정물화는 바로 그들의 무역의 성공, 기술, 계급, 삶의 철학이 진열된 쇼윈도였다. 이 그림은 자부심의 결정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허세 가득한 전시에서 멈추지 않는다.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은 동시에 삶의 덧없음(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을 조용히 환기시킨다. 식사는 중단되었고, 잔치는 끝났으며,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다. 접시는 마치 금방이라도 식탁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테이블 끝에 걸쳐 있고 그 불안한 균형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은유한다.
소금, 레몬, 굴 같은 음식들은 사치품인 동시에 곧 부패할 육체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시간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은 그렇게 드러난다. 작은 케이크 스탠드처럼 생긴 목 높은 접시, 타짜(Tazza)는 이미 옆으로 기울어져 있고, 구겨진 식탁보의 자락 하나만 당겨도 이 정적과 균형은 단숨에 무너질 듯 보인다. 정물화는 결국 풍요와 절제, 욕망과 공허, 아름다움과 무상함 사이를 오가는 하나의 사유의 무대다. 눈앞에 놓인 풍요는 견고한 것이 아니다.
결국 헤다의 정물화가 조용히 건네는 이야기처럼, 이 그림이 제작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37년, 튤립 구근 가격이 폭락하면서 네덜란드의 화려했던 주식 시장은 붕괴의 직격탄을 맞는다. 튤립 투기에 삶의 한몫을 걸었던 수많은 중산층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파산했고, 그들의 소비를 기반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화가들 역시 깊은 위기에 처한다.
어쩌면 이 그림을 주문했거나 혹은 기꺼이 사들였던 누군가도 그 갑작스러운 경제적 추락 앞에서 그림 한 점조차 지켜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경매 감정인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치고 리넨 천 한 장조차 예외 없이 값이 매겨졌을 것이다. 풍요의 상징으로 차려졌던 식탁 위 사물들은 실은 그렇게 현실의 균열을 앞질러 예감하고 있던 징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이토록 연약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잊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이 남긴 흔적들, 물건, 그림, 이름 같은 것들은 때로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리넨 천의 솔기를 따라 조용히 새겨진 작가의 서명, “Heda 1635”는 마치 실제 천에 수놓은 듯 정교하고, 그것은 과거의 한때를 증언한다.
결국 이 그림은 찰나의 순간 반짝였던 삶을 오늘의 시선으로 되새기게 하는, 우리의 눈을 위한 상차림이자 시간 위에 차려진 향연이다. 사물 속에 켜켜이 쌓인 그들의 이야기이자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