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이힐을 신는 이유는 발이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높은 굽만큼 올라가는 자신감과 ‘남에게 보이는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실제로도 청바지에 스니커즈 대신 하이힐을 신으면 보다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심미성에 발을 위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하이힐에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밴드를 부쳐야 하고 많이 걷기라도 한 날이면 집에 와서 하마처럼 부은 다리를 벽에 기대 놓아야 한다. 아니면 높은 베개 위에라도 얹어야 다리에 몰렸던 피가 순환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견뎌내야 할 고충이라고 하기에 꽤 크다. 그럼에도 그 아름다움의 유혹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외적인 모습, 남에게 보이는 내가 중요하던 20대 시절 하이힐에서 내려올 용기는 내게 없었다. 어떡하겠는가, 그저 발이 아파도 다음날 하이힐을 다시 신고 집에 와서 마사지를 해주는 수밖에.
하이힐에서 내려올 용기는 의외의 생명체에서 찾아왔다. 30대, 아이의 엄마가 되고부터 하이힐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할리우드 파파라치 사진을 보면 아기를 안고 하이힐을 신은 사진을 종종 볼 수 있지만 역시나 내게 그런 용맹한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맞이하는 엄마라는 역할에 엉성한 나 자신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편안한 신발을 신는 일이었다. 아기를 안고 가다 높은 굽을 신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든가, 긴급 상황에 뛰어야 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달려야 한다든가…. 스니커즈는 이런 불안으로부터 나를 잠재워 주었다.
발을 폭 감싸고 지면에 모든 면적이 닿아있다는 감각은 신체에 안정감을 드리운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차분해진다. 혹여 넘어질까 길 주변에 신경을 곤두설 필요도 계단을 내려갈 때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육아에는 나의 예민함을 집중시키는 요소들이 차고 넘치는데 신발까지 여기 한 몫 보태길 원치 않았다.
하이힐에서 내려와 스니커즈를 신고 나면 바라보던 세상도 달라진다. ‘거추장스러움, 럭셔리, 패스트패션, 유행’ 같은 수식어들이 대변했다면, 7센티 낮아진 세상은 ’심플함, 본질, 나만의 스타일, 슬로 패션‘ 같은 단어들이 채우고 있다.
복기하자면 화려함이 아닌 안락함이다. 돋보이게 하는 화려함은 없지만 대신 몸과 마음에 편안함과 즐거움이 깃든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허영심이 비워지고 나에게 잘하고 싶은 자족감이 파고든다.
이런 연유로 신발장에서 더는 신지 않는 하이힐과 화려한 신발들을 모두 비웠다. 이제 신발장에 나의 신발은 딱 4켤레가 남아있다.
4계절 모두 즐겨 신는 그레이 뉴발란스 스니커즈, 여름에 신는 플리플랍 쪼리와 이 쪼리를 신기전에 샀던 샌들(2년째 신지 않고 있기에 조만간 비워질 예정이다), 그리고 캠핑이나 바닷가 갈 때 신는 크록스까지.
가끔 추운 겨울이면 숏어그를 사서 신을 때도 있지만 바닷가 마을의 겨울은 춥지 않아 사지 않는 해가 더 많다. 일상적으로 신는 신발로 치면 총 2켤레다. (스니커즈와 쪼리)
가득 찬 옷장만큼 가득 찬 신발장에서도 ‘신을 게 없어!’ 법칙은 유효하다. 앞에서 항상 무얼 신어야 할지 모르겠고(선택지가 많기에) 결국 고민 끝에 자주 신는 것만 꺼내 신는다. 이 시절 나의 현관에는 언제나 벗어놓은 신발들, 신으려고 빼둔 신발들로 가득했다. 역시 신발장 안에는 오늘 수고한 신발들을 위한 공간 따윈 없었다. 많은 이들에게 현관은 그저 지나치는 공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온갖 신발들이 줄지어 있고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나 치우려고 내놓은 재활용품들까지 나와 있다. 이렇게 혼돈과 무질서가 가득한 이유는 물건을 편리하게 정리할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다. 가득 찬 신발장 안에는 그날 신은 신발들까지 보관할 여유 공간이 없다.
소유한 신발이 줄어들자 현관이 말끔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신발을 비워가면서 가족들 신발까지 함께 비워갔다. 자리만 차지하고 더 이상 신지 않는 신발, 불편해서 손이 잘 가지 않는 신발, 헤져서 기능을 다 한 신발을 모두 비웠다. 아이들 신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예뻐서 많이 다양하게 사주었지만 가만 지켜보면 즐겨 신는 것만 신는다. 계절별로 마음에 쏙 드는 신발 2개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
그렇게 신발장 내부에 빈 공간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레 벗은 신발들이 제 공간을 회복했다. 집에 오면 툭 하고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각자의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신발도 자기만의 방에서 긴 쉼을 갖는 것이다.
장 안에 걸어 놓은 방비 세트로 한 번씩 훔치기만 하면 되기에 현관 청소도 간결하다. 덕분에 현관은 말끔하게 단정하다. 특히 오랜 일정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올 때 단정한 현관이 맞이해주면 마치 집사가 와서 나의 옷과 가방을 들어주는 기분이 들곤 한다. 대접받는 기분말이다. 물건과 공간을 먼저 가꾸고 대접하면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신발장 안에 여유 공간이 많으니 신발을 밖에 둘 이유가 없어졌고, 이에 따라 별다른 노력 없이 항시 말끔한 현관이 나와 우리 가족을 맞이해주고 있다.
이 모든 시작은 하이힐에서 스니커즈로 내려온 시점에서부터다. 하이힐을 비우고 스니커즈를 신게 되면서 옷차림의 가벼움을 얻었다. 신발장이 넓어졌고 현관이 단정해졌다. 발이 편하고 다리가 건강하다.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신발이 적으니 그만큼 신발 관리에도 마음을 들여 하게 된다.
적은 만큼 소중하고 가치롭다.
좋은 신발이 그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이 있다.
가볍고 편안한 신발은 단정하고 안온한 일상으로 나를 데려다준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