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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사소한 행복

by 주하

그런 날이 있다. 내가 한없이 무용해지는 기분이 드는 날. 의미 있다 여긴 모든 것들이 무상하게 흘러내릴 것만 같은 날. 이런 무쓸모 논리가 나를 휘어 감을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무기력감은 나의 감정 곡선을 아래로 아래로 끌고 간다.

마침 아이 학교 참관수업까지 겹쳐 바삐 지냈다. 문득 거울 속 나를 보니 소모돼 있는 내가 보였다.


소모되는 내면을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받아 들고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정리이다.

집 곳곳은 어질러진 나의 내면처럼 흐트러져 있다.

얼룩이 묻은 흰색 바지처럼 눈에 거슬리는 게 또 있을까. 어디서 묻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며칠 된 얼룩을 손빨래하고 세탁기를 마저 돌리고 나니 본래의 티 없는 하얀색 바지가 되었다.

아침부터 달그락거리는 의자가 꼭 내 마음 같아 슬펐다. 드라이버를 가져와 풀린 나사를 조여주었다. 의자의 헐거워진 나사를 몇 번 조여주고 나니 처음처럼 단단해졌다. 화장대 의자로도 가습기 받침대로도 때로는 발 받침대로 만능으로 쓰이는 이케아 보조 의자다. 이렇게 다용도로 활용하면서도 홀대했다는 생각에, 몇 분만으로 금세 새것처럼 될 수 있는데 이 몇 분을 왜 그동안 이 의자에 주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로 괜히 미안했다. 이제 더 이상 덜 그락 거리지 않는다.


공간과 사람은 친구 사이다. 공간에는 어느새 그 사람의 내음이 소리 없이 자취 없이 베어 든다. 뚜렷하게 누구의 공간이다라는 수식어는 아닐지라도 자기만이 알아채고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곳곳에 묻어 나온다. 사람이 아프면 공간도 어둡고 사람이 건강하면 공간도 활기가 가득하다. 처음에는 사람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간이 사람을 압도해 간다. 삶을 바꾸고 싶으면 공간을 먼저 바꿔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오랜 시간과 깊은 감정을 주고받는 공간은 바로 집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감정과 내면을 바꾸고 싶을 때 가장 빠르고 간결한 변화를 선사하는 것도 집이 아닐까 싶다.

하여 '청소와 정리'는 집이라는 공간을 가꾼다는 의미와 동시에 나의 내면을 환히 밝히는 '등불'같은 언어가 되기도 한다.

집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집이 좋아지면서 자연스레 청소와 정리도 좋아졌다. 는 문장을 썼지만 실은 청소와 정리를 시작했기에 집이 좋아지고 좋아진 집이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청소와 정리를 하고 말끔해진 집이 나를 보며 환히 웃는다. 나의 마음은 집에 포근히 안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가까워진다. 서로를 닮아간다.

집을 돌보고 나니 마음의 결이 부드러워진다. 집안의 먼지들을 쓸어내듯 마음 사이사이 끼어있던 잡동사니들도 탈거해 나간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되었다. 비움의 생활을 지금까지 이어온 것도 작은 물건 하나부터였다. 책 한 권이었다. 오래도록 읽지 않고 간직만 해온 책 한 권을 비운 것이 시작이었다. 이 작은 것을 시작으로 삶의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다운사이징 라이프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방 한쪽 벽에 붙여져 있는 작은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행복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스친다. 이 넓고 무수한 벽들의 한쪽에서도 아주 조금을 차지하는 사소한 그림들이지만 이런 작고 사소한 행복의 조각을 모아야 한다고.

작고 사소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여름 해변에서 파라솔이

제공하는 한 뼘의 그늘이며.

제철 신비 복숭아 한 입 가득

베어 물때 나는 달콤한 여름향이며.

나의 영원한 베프와

함께 마시는 시원한 한 모금이고.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다.

문득 찾아오는 체리빛 하늘 내음이고.

떡볶이 후에 챙겨 먹는 볶음밥이다.


작은 것에는 힘이 들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는 부담이 비껴간다. 그렇다고 그저 이 작고 사소한 것들이 우리 곁에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 나를 위해 작은 시간과 짧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는 데로 살아가면 내 마음이 아픈지도 소모되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내면을 계속 들여다보고 내 마음속 풍경을 어루만져야 한다.

항상 같은 구성 요소들을 바꾸고 재배치해 본다.

새로운 풍경소리는 마음을 환기시킨다.

삶에서 불필요한 작은 군더더기는 비워내고 내가 좋아하는 작고 사소한 행복은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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