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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와 다이어리

by 주하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올 때면 매번 소리 없는 공허함 같은 것이 찾아오곤 했다.

뒤로 보낸 1년이 만들어낸 지금이라는 결과물에 항상 만족보다 불만족이 앞섰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또 1년을 속절없이 보내기만 했구나...

이런 불안은 자연스레 새해의 새로움이라는 위안으로 이어지고, 이 모든 감정들을 포괄적으로 포용한 물건이 내게 다이어리였다.

불안이라는 과거와 희망이라는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다이어리는 꼭 나의 흔들리는 마음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동질감은 나를 다이어리 찾기에 매달리게 했다.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사고 나면 잃어버린 조각을 끼운 듯 완전해질 것만 같았기에.

하여 연말이 다가올 무렵 11월부터 다이어리를 찾아 헤맸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인 것도 아니었다. 물건의 개수에 한정을 두지 않던 시절이라 마음에 들면 바로 사곤 했다. 분명 벌써 샀으면서도 좋은 다이어리가 보이면 또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로는 길어야 딱 한 두 달이었다.

첫 장에 적어둔 새해의 목표나 계획 따위들은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서 점점 희미하게 잊혀갔다. 새해 초에만 반짝 열의를 내비치다가 나중에는 어디 박혀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마는.

연말과 연초에만 주목받는 이벤트 같은 소비 품목 중 하나였다.



몇 해 전 우연히 사은품으로 받은 다이어리가 몰스킨이라는 브랜드였다.

하드커버는 단단하면서 차갑지 않고 라운딩 처리는 각진 마음을 둥글게 만져준다.

속지의 촉감도 보드랍고 베이직한 구성과 들고 다니기에도 부담 없는 사이즈가 마음에 쏙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본질을 향한 정성만 가득 담은 듯한 매끄러움이 나를 몰스킨이라는 브랜드에

빠지게 만들었다.

맥시멀라이프를 살던 때에는 다이어리가 항상 여러 개씩 있었다.

그 당시에는 쇼핑이 좋아서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오롯이 들어오는 단 하나의 다이어리를 갖지 못해서였다.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보고 어느 것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한 마음은 여기저기 기웃거리기에 바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종수와 개수는 그 사람의 내면이 투영된 결과다.

비움으로 가벼워진 소유물의 세계는 좁은 만큼 깊어진다. 넓고 얕게 퍼져있는 물건들일 때는

잘 몰랐던 마음의 방향이 좁고 깊게 움푹 파고든 물건들이 되고부터 선명하게 드러난다. 물건을 향한 호불호 즉 나의 기호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알록달록 화려한 디자인 보다 슴슴하고 담백한 디자인과 가볍지만 오래 써도 흐트러짐이 없는 태를 유지하길 바란다. 기능적인 면에서도 단순하게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는 기호는 다이어리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갔다.

단 하나의 다이어리는 갖는다는 것은, 단 하나의 브랜드를 애정한다는 것은 삶의 여러 방향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더 이상 연말마다 헤매던 다이어리 유목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전체 삶에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고.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며. 삶에 무엇보다 관심과 정성을 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다이어트 성공하기, 멋진 한 해 보내기, 여행 3곳 이상 하기, 자격증 따기.’ 같은 꾸미기식 계획 따위는 더 이상 적지 않는다. 부담과 회의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화려한 계획 대신 오늘 하루하루의 기록으로 채워간다. 미래의 거대한 목표 대신 놓치기 쉬운 그날그날의 감정들과 일상을 써 내려간다. 다이어리는 더 이상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장식용이 아니다. 장밋빛 미래를 채워 보상받으려는 안전장치도 아니다.

페이지들을 훑어볼 때면 잘 정리되어 있는 방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이 글의 방에는 나의 생각들, 가치관들, 욕구들이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와 앞으로 삶의 지평 등을 알려준다. 살아가는 데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싶은 데로 살 수 있는 삶의 주도권을 갖게 해 준다.

연말 더 이상 새로운 다이어리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매년 같은 디자인과 사이즈, 브랜드의 다이어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에 평온을 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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