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인용 테이블

by 주하
KakaoTalk_20250613_114714770_01.jpg



우리 모두에게는 로망이 숨어있다.

누군가에게는 음식에 대한,

누군가에게는 가방에 대한,

누군가에게는 여행에 대한,

누군가에게는 집에 대한 로망일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 공간에 대한, 더 세밀히 파고들면 집에 대한 그것도 콕 집어 테이블 로망이 잠재돼 있었다. 이 로망 혹은 욕망은 평소 잠재돼 있다가 불현듯 현실로 건져져 시각화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잡지의 인테리어 기사를 볼 때라든지, 책 속에서 우연히 예쁜 테이블 사진을 접할 때 혹은 카페에서 앉아있던 테이블이 마음에 쏙 들 때면 내재돼있던 테이블 로망이 현실로 가시화되곤 한다.


거실 창가를 마주하고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옆 TV 자리에는 TV는 없고 대신 3단 책장이 줄지어 있다. 책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다. 어딘가 안락한 소파까지 놓이고 나면 오래도록 내면에 그리고 있던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왜 테이블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의 오래된 욕망을 내비친다.

신혼과 함께 시작된 미니멀라이프라는 방향은 식탁과 테이블을 합치게 했다. 당시 신혼집이 좁기도 했고 식탁과 테이블 둘 다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호사였다. 테이블에서 우리 둘은 집밥을 함께 먹고, 간식을 직접 해 먹으면서 소꿉놀이 하듯 즐거웠다. 혼자 있는 낮에는 앉아서 글을 끄적거리고 책을 읽었다.

넓은 집으로 옮기고 아이들이 생기고 식탁이 바뀌어도 테이블의 용도는 비슷했다. 여전히 식탁만으로 쓰임보다는 다용도 테이블의 역할로 자리했다.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갓 지은 맛을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 그날의 행복이었다. 음식의 온기와 서로에게 이어진 마음이라는 느슨한 연대감이 전하는 포근함이 좋았다.

혼자의 시간에는 글을 읽고 쓰다가 가족과 어울릴 때는 함께 먹고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행위가 테이블 위에 모두 존재한다.


어렸을 적 거실은 TV에게 점령당했었다. TV는 우리 가족의 온기를 삼키고 무미 건조한 기계음으로만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 풍경 속에 TV를 제거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TV가 없고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면 어릴 적 추억 속에도 다양한 온기가 채워질까? 하고 혼자 의미 없는 물음에 답해본다.

유년의 장면 속은 바꿀 수 없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여기에 전형화된 거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거실 한 면은 TV를 위해 온전히 내어주고 그 맞은편은 TV시청을 위해 존재하는 소파가 있는 장면 말이다.

해서 TV가 왕처럼 군림하는 집이 아닌 테이블이 한 중심을 차지한 거실을 꿈꾸게 되었다.


최근 드디어 그 꿈이 이뤄졌다. 8인용 테이블 겸 식탁이 거실 창가 쪽에 놓였다. 4인 가족인데 왜 8인용 테이블일까? 의문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미니멀라이프 10년 차라는 수식어와는 더 어울리지 않는 숫자이기에.

신혼 초 2인 식구일 때도 내면은 대형 테이블을 원했다. 13평 빌라여서 선택의 폭이 좁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대형테이블을 원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테이블은 내게 먹는다, 쓰다, 나누다는 동사로 변환된다. 바로 이 동사들이 내 삶의 수식어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먹다:맛있는 집밥을 먹고

쓰다:즐거운 책을 읽고 좋아하는 글을 쓰고

나누다:혼자 사색을 혹은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나누고. 이 보다 내게 중요한 게 있을까...


내 삶 속의 절대적인 가치이자 기준이 되는 다양한 행위들이 쏟아지는 물건이기에 이것만큼은 가장 존재감있고 마음에 들어야 했다.

실제로 이 테이블이 집에 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나와 우리 가족이 소유한 물건 중에 가장 오랜 시간과 비싼 비용을 치르고 소유한 물건이다.


오래도록 내면에 그린 장면들이 8인용 오크 원목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2000*900 사이즈는 가족의 평화를 제공한다. 한 면에 의자 3개도 여유로이 들어간다. 이로써 서로 엄마 혹은 아빠 옆에 앉겠다는 공분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나무 결이 살아있는 감촉은 생각보다 보드랍다. 세라믹 식탁의 차가운 촉감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연의 따스한 감성이다. 물론 그만큼 오염에 쉽겠지만 이 테이블에 쌓이는 우리 가족의 역사라고 여기자 오히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방금 갓 지은 보슬보슬한 밥을 먹는다. 핑크 즙이 줄줄 흐르는 시원한 수박을 손에 들고 나눠먹는다. 서로의 사사로운 오늘 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있고 나는 옆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서재에 혼자 있을 때처럼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 아이들도 하나 둘 옆 책장에서 책을 꺼내와 읽는다. 혹은 종이를 가져와 옆에서 끄적거린다. 소파를 더 사랑하는 아빠지만 어느새 곁에와 책을 펼친다. 따로 각자의 시간이지만 테이블이라는 테두리는 그 위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실로 엮어준다.


비로소 지난 10년간의 식탁 원정대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었다.

테이블을 보고 있으니 무엇보다 중간에 걸리 적 거리는 지지대가 없는 단아한 테이블 자태는 군더더기 없는 나의 미니멀라이프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