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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Feb 02. 2024

한 겨울 속 양산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 흔히 갖게 마련인 신랄함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조심성에 가까운 차분함을 가지고, 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보았다. 얼굴의 음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주름을 더 깊어 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손가락 두 개로 잡아당기는 그 탄력 없는 살갗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 아가씨의 대열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외모에 몹시 신경을 쓰는 또 다른 폴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로서는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중에서


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나오는 폴처럼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세수하고 로션만 겨우 바른 민낯의 푸석함이 마주했다. 핀으로 대충 올려 묶은 머리는 삐죽삐죽 나와있었고, 표정에는 생기를 잃은 피곤함이 두 볼에 고여 있었다. 그 곁에 뿌려진 까만 깨들을 손끝으로 가져가자 지난 시간들이 기억 위로 하나하나 스쳐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에 온통 관심이 기울어지고부터, 나는 선크림 바르는걸 자주 깜박하기 시작했다. 육아가 힘들 거라는 충분한 상상과 마음다짐으로도 현실의 크기를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다. 연고도 없는 남편 직장 앞에 지내고 있던 시기라 맡길 곳 없이 오로지 한 생명의 책임이 나에게만 부여되었고, 그마저 한 명 있는 공동 양육자 마저 매일 이어지는 야근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적기만 했다. 말이라도 하면 바로 들어줄 텐데, 왜 우는지 알 길도 없고, 항시 아이의 행동에 민감하게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모든 에너지는 하루하루 소진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크림 바르는 건 사치고, 어떤 날은 세수하는 것 마자 버거울 때가 많았다. 밥은 대충 빵으로 서서 때우거나 식은 밥에 김에 대충 후루룩 먹기 일쑤였다. 아이가 원생활에 적응하고 나만의 여유시간을 좀 누려보고자 할 때 둘째를 임신했다. 

다시 반복되는 입덧과 만삭의 무거움과 출산의 고통이 고스란히 지나갔고, 이제는 책임져야 하는 생명이 둘로 늘었다. 아이 둘은 두 배가 아니었다. 체감상으로 열 배 이상이었다. 여유 있던 혼자만의 시간은 다시 저 멀리 우주 밖으로 떠나고, 더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루틴이 시작되었다. 아이 둘을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머리까지 묶이고 나면 언제나 남은 시간은 5분도 안된다. 이 바늘 같은 시간에 씻고, 옷 입고 나가려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옷이라도 거꾸로 입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날 아침 등원길에 아이친구 엄마이자 운동 메이트인 Y를 만났다. "방금 일어났나 봐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나는 수긍의 답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오는 길에 그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텅 빈 집,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아무 이유 없이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다가왔다. 전날 아이들의 뒤척임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무척 피곤해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얘는 무슨 젊은 애가 한 여름도 아닌데 양산을 쓰고 다니니!"

어느 가을날 가족들과 외식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오십 대인 당신도 쓰지 않은 양산을 이십 대 딸이 쓰고 있으니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밖에서 내가 양산을 쓸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누가 여름도 아닌데 양산을 쓰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빛으로 꾸짖었다. 엄마의 말처럼 가을에 그것도 햇빛이 숨은 흐린 날에 양산을 쓰는 사람과 마주치는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어른들이 으레 남들과 다른것, 남들 사이에 튀는 행동을 하는것을 싫어하듯, 엄마는 연중 양산을 쓰는 딸의 모습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십대인 나에게는 그만큼 갑자기 찾아온 까만 깨들이 충격이었나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은 다시 깨끗한 피부를 되찾고싶은 욕망 아래 쉽게 묻혔다.

호주에서 1년여간 오랜 여행을 하고 집에 왔을 때는 다른 것들에 적응하느라 잘 몰랐었다. 그러다 점점 한국의 온도와 속도, 생활에 적응하자 거울 속 까만 존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피부 좋다는 말을 듣고 다니던 나에게 처음 침략한 외부 존재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 이십 대인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돌이켜 보니 호주의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낮은 하늘과 가까운 구름, 반짝이는 바다는 분명 아름다운 자연의 그림이지만 그로 향한 나의 피부에게는 뜨거운 자외선을 선사했던 것이다. 그래. 자외선이다. 원인을 알게 되자 원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1년만 365일 쓰고 다녀보자. 그렇게 우산 겸 양산 겸. 나는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고 양산과 한 몸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꿋꿋이 1년 365일 양산을 쓴 덕분에 이십 대에 뿌려진 얼굴 위의 깨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틈틈이 거울 맞은편으로 스쳐가는 여자의 피부 상태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하루는 안 되겠다 싶어 등원길에 양산을 쓰고 나갔었다. 양산을 쓰고 둘째 유모차를 끌고 첫째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서커스의 공중 2단 회전만큼 어려운 일이란 것을 단 몇 분 만에 간파했다. 가뜩이나 유모차에 못타 마음이 편치 않은 첫째에게 손까지 제대로 잡아주지 않자 아이의 참던 울음이 막 터진 것이었다. 나는 후다닥 양산을 구겨 넣고 첫째의 한 손을 미안해하며 꼭 잡아주었다. '그래, 내게 무슨 양산이냐... 양산은....'

그 뒤로 양산은 여름철 바닷가에 물놀이나 피크닉 갈 때만 잠깐 쓰는 용도가 되었다. 



나는 거울 속 나를 보는 것이 왜 낯설게 느껴졌을까? 여러 해의 시간이 쌓여있는 이 물음표는 계속 마음속에 유영을 하며 둥둥 떠다녔다. 

그제야 엄마가 지난날 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몸 좀 회복되면 피부과 좀 가야겠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딸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엄마는 내게 말했지만 그때는 아이를 보고 있는 중이라 정신이 없어서 한 귀로 흘렸다. 나의 두 눈과 시선은 아이에게로 향해있었다. 할머니가 된 엄마의 시선도 다 큰 딸인 나에게 향해있었다. 엄마 눈에는 자식이 들어있다.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기보다는 두 눈앞에 아른거리는 나를 닮은 어린 존재들에게 향한다. 자신의 얼굴에 늘어가는 잡티들은 보이지 않으면서 자녀들의 뽀얀 얼굴은 수시로 어루만진다. 생의 한 부분을 엮어 한 생명을 돌봄으로써 엄마가 되어간다. 오로지 자식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하면서. 

거울 속 피부 위에 쌓여있는 시간의 층을 바라보면서 폴이 깨달은 것이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공격해 온 것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었다면, 내가 뺨 위에 뿌려진 까만 깨들을 보고 깨달은 것은 나의 생생함 위에 까만 덧칠을 해온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돌본다는 것은, 자식을 기른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값진 일이다. 값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값어치이고 처음 느껴보는 기쁨의 원천이다. 이제는 그만큼 나를 돌보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로 했다. 타인을 바라보듯 아이를 바라보듯 나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 또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로 했다. 나를 위해 일어나자 마자 세수를 하고 기초 크림들을 잘 발라주고, 선크림도 바르기로 했다. 피부과에서 관리는 받지 않아도, 틈틈이 마스크 팩도 하고 하루 2L의 충분한 수분도 챙겨 마시고 림프 마사지도 하기로 했다. 아직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야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겨울에도 햇살이 얕은 한겨울에도 다시 양산을 쓰기로 했다. 

오늘도 겨울 하늘의 차가운 공기에 걸린 몇 안 되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양산을 쓰고 산책을 한다. 잊고 지낸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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