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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Feb 05. 2024

상처

어깨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맞은 주사 자국이 몸이 자라면서 같이 자라났다. 어깨에 커지는 존재를 마주하고서야 내 피부가 '켈로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켈로이드'는 피부에 난 상처가 회복될 때 방어하는 조직이 과도하게 생성되면서 생기게 된다. 이 붉은 조직이 세력을 확장할 때면 수십 바늘로 그 부위를 누가 계속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계속된다. 그런 날이면 그 주기적인 통증에 소름끼치는 몸서리를 치며 밤을 설쳤다. 덕분에 어떤 주사도 가뿐히 맞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일한 해결책인 스테로이드 주사를 한 번 맞아 보고 너무 아파서 치료조차 포기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깨에 난 붉은 자국은 초등학교 이후부터 쭉 내가 어디를 가든 함께 공생 중이었다. 

상처를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망설이게 된다. 해서 워터파크나 찜질방, 공중목욕탕 등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남들은 정작 신경도 안 쓸 테지만, 이 상처에 오랜 시간 눌려있던 내면의 자아에게는 그렇지 않다. 혹여 보일까 봐, 쳐다볼까 봐, 계속 신경 써야 하기에 몇 번 가고 그다음부터 발길을 두지 않았다. 


외부의 상처가 피부 위에 쌓인다면, 내면 자아의 상처는 마음 안에 쌓이게 된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어깨의 붉은 자국이 자라듯,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어린 자아의 상처 또한 크기가 커진다. 어른이 되면서 함께 자란 마음속 상처는 커다랗게 존재의 내면을 장악해 버린다. 어리면 어릴수록 그 상처가 자라나는 시간이 길어지기에 그 크기 또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자신을 돌보는 방법도, 상처를 오롯이 바라보는 방법도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기에 어릴수록 받은 상처는 내면을 더 크게 장악해 버린다. 정작 어렸을 때는 그 상처들을 상처라고 인지하지 조차 못한다. 커가면서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때 그 아픔이 상처였음을, 자신이 자라면서 함께 자랐음을, 어깨에 붙은 붉은 자국처럼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전한 아픔에 막연하고, 상처에 대한 원망만 늘어간다. 


얼마 전 브런치에 어느 작가님의 글을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에 관한 글이었다. 길지도 않은 글이었지만 그 글 하나만 읽었는데도 그의 농축된 아픔이 고스란히 나의 영혼에 투여되는 느낌이었다. 다른 글들도 읽어보니 몸까지 아프다는 그의 이야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화면 속 그의 글만 계속 바라보았다. 댓글을 적었다 지웠다를 계속 반복했지만 끝내 아무 글도 남기질 못했다. 단 몇 줄의 말들로 감히 그에게 전해줄 수 있는 말이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트북을 끄고 나의 상처들과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내 어깨의 붉은 자국과 함께 자라난 지난 어린 자아의 아픔과 함께 자라난 상처까지. 그리고 지금 현재 어깨의 옅어져 가는 흉터와 희미해져 가는 마음속 상처와 회복된 어린 자아의 모습까지.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내면 속 커져버린 상처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아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남도 오롯이 사랑할 수 없었다. 삶은 빛을 잃고 가끔 찾아온 행복의 끝에는 언제나 다시 떨어지는 수렁텅이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행복하지 않았던 학교와 아버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음에도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새로 도전하고 시작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내 삶도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은 갈망이 일기 시작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두들겼다. 

책 속에는 왠지 내가 던지는 질문과 의문들에 대한 답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 한 권, 한 권 읽어나갔다. 4년여간 책 속의 여행을 하면서 점점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여정 속에 책 한 권만 꼽으라면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이겠다.  이 책을 만난 덕분에 나를 옭아매던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어려워서 무슨 말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루에 1페이지 겨우 읽고 덮고 다시 다음날 2페이지 정도 읽고 이렇게 더뎠다. 어느새 책 전체를 1번 읽고 너무 좋아서 2번 읽고, 3번 읽고.....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 책과 한지 십여년이 지났고 아직도 서재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 때문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고통임에도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


저자는 우리가 받는 고통의 원인이 내면 속 끓이지 않는 마음, 에고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마음을 멈추기 위함이 명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상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내면 속 생각들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해 준다. 저자는 명상을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생각하는 자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과 함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전한다. 

과거와 미래는 기억 속의 시점일 뿐이고 우리가 소유하는 시간은 항상 지금 이 순간뿐이며,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음으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에고를 끄고 내면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를 수십 년간 힘들게 해온 원인이 내 마음에 있음을, 에고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마음속 소리들을 인식하고 명상하면서, 점점 그 잡음들을 잠재울 수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과거라는 후회와 원망등의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에게 더는 과거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과거는 점점 기억 속에서 힘을 잃어나갔다. 내 생에서 크게 차지하며 회색빛 하늘을 뿌렸던 과거의 영향력이 점점 옅어졌다. 

이 깨달음은 아픔으로부터, 상처로부터 자유를 주었다. 나는 자유를 얻었고,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남도 오롯이 사랑하게 되었다. 행복 끝에 기다리는 수렁텅이 대신에 지금의 평온함이 계속 함께 하고 있다(물론 마음때문에 힘든 날들도 분명 있지만) 더 이상 미래의 행복만을 좇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 순 간을 살고, 이 순 간에 감사할 수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미 지나버린 아픔과 상처를 들춰내기 싫었다. 그렇게 외면했었다. 하지만 그 작가님의 글을 마주하고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글로써 상처를 치유했듯이 나의 글이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단 한 명일지라도.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이제는 그 상처를 놓아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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