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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드 May 18. 2023

비 오는 날에

떠오르는 추억 하나쯤은 있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빗속을 걷기 위해 부러 집을 나설 만큼. 빗속을 거닐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아하는 음악 골라 담아 놓은 플레이리스트, 에어팟, 커다란 우산이다. 세 가지는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준비물 되시겠다. 바람에도 끄떡없는 커다랗고 튼튼한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다리 아플 때까지 걸어주곤 한다, 비 내리는 날에. 때에 따라 내려주는 비로 인해 기분 좋게 샤워하는 식물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목이 말라 축 쳐져 있던 잎들에 수분이 가득 차서 생생해지는 걸 보고 있으면 나도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곤 하니까. 비가 내리는 날엔 조금은 짧은 바지를 입는다. 청 재질의 옷은 물에 젖으면 무겁고 축축 쳐지고 몸에 감기기 때문에 피하는 편이다. 가장 좋은 건 흔히 말하는 프라다 천 소재에 길이는 7부 정도. 신발은 크록스가 좋다. 양말 젖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빗속을 걷다 보면 떠오르는 추억 하나씩은 있지 않나?

도독도독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섞인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막연하게 무언가가 누군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리워지는 대상은 현재 내 곁에 없는 그 누군가이다.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리움보다는 보고픔이란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그리움은 지금 당장 볼 수 없어 애가 닳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련하고 뭔가 간질간질하는 그런 느낌이다.




내게는 십수 년 전, 내 나이 열일곱 살이던 그 해 여름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곧 나의 첫사랑 이야기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중창단 연습을 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친한 A언니의 소개로 처음 참석하는 날이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어 조금은 설레고 긴장이 되던 날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A언니랑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순간, 유난히 밝은 빛을 띠고 다가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소년만이 보였다. 이런 느낌 살면서 처음이었다. (여보 미안해 ㅜㅜ)



자그마한 얼굴, 긴 다리, 다무진 몸매, 키는 180cm가 넘어 보였다. (이때부터였나? 키 큰 남자가 이상형이 되었던 것이?)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봐 버렸다. 대체 이 아이는 어디 있다 나타나는 거지? 한 동네 사는 아이가 맞아? 하는 순간,

“A누나!!” 하며 A언니에게 알은체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혜진아 인사해. 같은 중창단하는 B고 너랑 동갑. 친구네? “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중. 창. 단..

쏴뤼질러! 이것은 데스티니야 하며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포커페이스 못하는 내 얼굴은 살짝 붉어졌을 것이고, 입은 귀를 향해 자꾸만 뻗어갔을 것이다. 동갑 그리고 B, 동갑 그리고 B, 동갑 그리고 B, 동갑 그리고 B, 동갑 그리고 B. 동갑과 이름이 내 머리를 잠식해 버렸다. 으하하하하 매주 볼 수 있겠구나?



B를 좋아했다. 처음 본 순간 반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농구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심지어 공부도 잘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 안경을 썼는데, 안경 썼을 때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안경 썼을 때 지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이상형이다. 한 마디로 이 아이는 내 이상형. 심지어 나와 동갑! 중창단 연습을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도 잘 못 하고 조금 낯도 가리는 나는, B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좋아하는 마음만 속으로 키우고 있었다.



B와 친해져야 했다.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나…. 시험 기간을 집중 공략하자!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고민을 하다가… B가 다니는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고민을 공부하는 데 썼으면 스펙이 달라졌을 텐데.. 지금에서야 아쉽지 그 당시는 전혀 네버! 에버!!!

공부하다 머리 식힐 겸 휴게실에 오면  B도 나와 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두 마디 더 섞게 됐다. 시험 기간, 범위, 시험 시간표 같은 것들을 공유했다. 학교는 달랐지만 시험 기간은 대개 비슷했고 학생 사이에서야 그런 이야기는 “오늘 날씨 참 좋지?” 하며 아이스 브레이킹하기 제격인 화제 아니던가! 독서실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전보다 조금 더 친밀한 사이로 발전한 것은 당연지사. 역시 자주 봐야 정이 쌓이는 법!

독서실이 문을 닫는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나오면 B도 나오고, 자연스레 집까지 바래다주는 날들이 한 달간 이어졌다. 집까지 오는 시간 20분 정도. 그 길이 두 배로 세 배로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고 또 바랐다.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 가는 B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들어와 잠자리에 누워서 혼자 배시시 웃던 날들이 있었다.



시험이 다 끝나고 중창단 연습이 있던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한 달간 매일 보냈던 시간 덕이었을까? 서로가 주고받는 눈길이 조금 더 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번씩 마주치면 서로를 향해서 활짝 웃어주고, 난 그게 좋아 혼자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너무 티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습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가는 길, B와 자연스레 걷기 시작했다.


B “집에 갈 거야?”

나 “아니, 빗속을 좀 더 걷고 싶은데…”

B “그럼 같이 걸을까?”

나 “그.. 럴…까?” (아싸 가오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산 두 개 중 한 개는 접고, 큰 우산 속 두 명이 된 우리는 그저 걸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곧 다가올 고3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할 공부는 많은데 턱 없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시간 등 현실적 고민들. 난 아픈 몸에 대한 속상함과 그로 인해 자꾸만 포기하게 되는 꿈에 대한 아쉬움,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한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 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걸었다. 좁은 우산 속이기에 나의 오른팔이 그 아이 왼팔에 자꾸만 닿았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쿵쾅쿵쾅. 바로 옆에 서 있는 B의 귀에 들리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될 만큼 소리가 컸다.




키가 큰 B는 나를 위해 우산을 잘 받쳐주었다. 그 덕에 나는 신발 이외에는 거의 젖지 않았지만 청바지에 흰 남방을 입은 B의 오른쪽은 반이나 젖어있었다. 빗속을 여섯 시간이나 걸은 덕분이었다. 신발이 얼마나 젖었는지 걸을 때마다 찌걱찌걱 물소리가 났고 우린 그게 재밌다고 한참을 웃었다. 갔던 길 되돌아 집 쪽으로 걸어간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다. 밤이 깊어가는데 난 헤어지기가 싫고 그렇다고 계속 걸을 수도 없고 미칠 것 같은 마음이다. 그걸 이 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드디어 집 앞.



B ”오늘 즐거웠어. 잘 들어 가. “

나 ”응 나도 즐거웠어. 고마워. 조심히 가. “



삐걱 거리는 철대문을 열고 왼쪽으로 돌아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B가 서 있는 걸 바라본다. 어서 들어가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아쉬운 마음 가득 담아 손을 흔든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현관을 닫고 속으로 5초를 센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다시 대문으로 나가 B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오른팔이 흠뻑 젖어 옷이 착 달라붙어 있다. 골목을 빠져나가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본다.

’잘 가.  나. 너. 많이 좋아해. ‘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다.



비가 내리는 날엔 유독 그날이 많이 생각난다.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았던 얼굴도 떠오른다. 나를 바래다주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생각나는 소중한 추억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마음에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기분이 든다.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추억 비를 핑계 삼아 꺼내본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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