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 한정원, 시와 산책 중에서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내 몸과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며칠 전 일이다. 고요한 집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재밌었지만 이상하게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커피도 한 잔 하고 싶은 마음, 잠시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카페를 가고 싶진 않고, 고요하지만 마음이 평온해지고 예쁜 곳을 가고 싶어 진다. 그럴 땐 숲만 한 게 없다.
읏차! 하고 몸을 일으킨다. 가벼운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담는다. 책이 안 읽힌다면서 책을 들고나가는 마음이라니..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파우치에 들어있는 커피 한 봉지와 얼음컵을 샀다. 레귤러 사이즈 기준으로 천삼백 원. 넓고 쾌적한 매장과 고객이 실수로 쏟은 커피도 다시 만들어준다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아메리카노에 비하면 삼분의 일의 가격이다. 왠지 이득을 보는 이 기분은 뭔가? 얼음컵은 플라스틱이 아니고 종이컵이다. 환경을 사랑하는 일곱 시에서 열한 시 편의점. 얼음컵에 파우치 안에 들어있던 맑은 느낌의 까만 액체를 들이붓는다. 아주 짧은 시간으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완성이 됐다. 한 손에 든 커피와 다른 손에 든 작은 보조가방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봄바람을 느끼며 동네 뒷산으로 걸어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불어주는 바람 덕분에 산길을 오르는 초입부터 쏴~~ 하는,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빌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좌우로 흔들린다. ‘이러다 가지가 부러지는 거 아니야? ’싶은 만큼의 강한 바람 앞에서도 림보를 하는 선수처럼 유유히 가지를 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유연함도 선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나 좀 유연하지 않냐?” 하며 찡긋 윙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왜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는지… 혼자 싱긋 웃어본다. 남들이 보면 산에 미친년 한 명이 나타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천천히 오른다. 산에 오를 땐 결코 속도를 내서는 안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상하좌우를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어떤 꽃이 제철이지? 하늘색은 어떻지? 땅에는 어떤 곤충들이 지나가지? 천천히 걷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것들이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고 자연과 하나씩 눈을 맞추는 심정으로 걷기 시작하면 자연의 속도에 내 발걸음을 맞추게 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에는 온통 아까시 꽃 향기로 진동을 했었다. ‘이 산에 이렇게 아까시나무가 많았다고? ’ 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아까시나무. 마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가지가 휠 정도로 달려있던 아까시 꽃. 그 꽃에서 흘러나온 향기가 내 코에 내 눈에 내 맘에 와닿는다. 눈을 감고 느끼면 조금 더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꽃송이 하나하나 눈으로 바라본다. 하얗고 조그마한 잎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심정일까?
이젠 그 아까시꽃이 진다. 탱글탱글 싱싱한 자태 뽐내던 아이들이 말라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주니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아까시꽃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니 하얀색이라 그런지 비보다는 눈에 가깝게 느껴진다. 5월에 만나는 아까시꽃눈. 그렇게 떨어진 꽃잎은 마치 흰 융단을 깔아놓은 것같다. 흰 융단을 자세히 본다. 흰색이었던 꽃송이가 누런색으로 변해있다. 흰빛이 누런빛이 되기까지 너희들 참 애썼구나 싶었다. 벌에게는 꿀을 주고, 사람에게는 향기를 주고… 이 자그마한 아이들이 주는 나눔을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받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걸음씩 내딛는다. 이번에 갈 곳은 미나리아재비 군락지다. 5월이 제철인 꽃. 빤질빤질 윤이 나는 자그마한 노란 꽃잎 다섯 장. 방금 세수를 하고 얼굴에 기초화장을 마친 청초한 소녀 같은 모습을 한 자태에 빠져버려 5월만 되면 그 꽃을 보러 부러 집을 나선다. 영어로는 butter cup이라 부른다지.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을 친구의 턱 밑에 갖다 대는 오래된 놀이가 있는데 꽃의 밝은 노란빛이 턱에 비친 아이는 버터를 좋아하게 될 운명이라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윤이 나는 미나리아재비를 보고 군락지 옆쪽으로 살짝 피어있는 작약도 한참을 본다. 이미 피어있는 아이도 있고, 오동통한 봉오리로 곧 개화를 준비하는 아이도 있다.
“안녕? 많이 피었네. 넌 조금 더 있어야겠다. 다음에 다시 올게. 그땐 활짝 피어서 만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말도 걸어본다. 그러면 작약이 “다음에 또 보러 와”라고 대답이라도 할 것 같다.
다시 걷는다. 해발 70m밖에 되지 않는 자그맣고 야트막한 산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무와 꽃이 핀다. 요즘 핫한 꽃은 찔레꽃인 듯싶다. 하트모양을 한 하얀색 꽃잎 네 장, 노란색으로 수술암술이 “벌들아 여기야~ 어서 와” 하는 것처럼 존재감 드러내며 위로 솟아있다. 흰색과 노랑의 색 조합, 거기에 초록색 잎사귀까지. 자연은 어느 유명 화가 못지않은 색감을 지니고 있다. 이 색을 누가 흉내 낼 수 있을까 작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찔레꽃 사진도 찍고 끙차 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같은 코스로 세 바퀴를 돌고 벤치에 앉는다.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드디어 오감이 다 열렸다.
자연으로 들어오는 순간, 도시나 닫힌 공간에서는 잘 열리지 않는 감각들이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앞다투어 깨어난다. 나무와 꽃을 보느라 시각이 먼저 열린다. 바람으로 인한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촉각이, 나무와 꽃에서 나오는 향기로 후각이, 갖가지 새소리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로 인해 청각이, 들고 온 커피로 인해 마침내 미각마저 열려버렸다. 이럴 땐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주변은 고요하다. 그 고요함 사이를 뚫고 자연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조금씩 다 다른 새들의 지저귐. 나뭇잎들의 하모니. 자연이 내는 소리는 서로를 절대 방해하지도 해치지도 않는다. 어떤 악기가 내는 소리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왔던 길을 슬슬 내려간다. 눈에 담고 싶은 것들 하나하나 더 바라본다. 영차영차 자기보다 더 큰 짐을 지고 가는 개미를 밟을 새라 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조심 걷는다. 잠깐 있다 내려온 줄 알았는데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꿈을 꾼 것일까? 한낮의 꿈같았던 시간이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 한정원, 시와 산책 중에서
산책을 하고 왔다고 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는 생긴다. 나를 조금은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연과 그 속에서 빚을 지고 살아가는 나의 작음이 보인다. 소소하지만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생긴다. 그래서일까. 내가 본 아름다운 것들을 당신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가면 이렇게 이쁜 꽃이 있답니다. 여긴 이렇게나 푸릇푸릇하답니다 하며 같이 그쪽을 향해 걷고 싶어 진다.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테지만 보고 나면 생기는 마음의 소원. 더 오래 보고 싶다 그러니 지켜야겠다는 마음.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도 바깥에선 새소리가 한창이다. 자기들끼리 계모임이라도 하는 것일까? 어디가 쉬기 좋은 명당인지, 먹을 곳이 많은지 정보를 나누는 것일까?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산책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 걷지 않았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들이다. 오늘도 잠시 걸어야겠다. 작약이 예쁘게 피었을까 궁금해하며 안부차 가 봐야겠다. 그 이쁜이는 나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나 무슨 상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