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세 살 때였다. 마라톤을 시작한 건. 거창하게 마라톤까지는 아니고 달리기라고 해 두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집콕으로인한 코로나블루로 몸무림 치던 때였다.
우연히 알게 된 815 광복런!
‘매일 달리는 건 힘들어도 이건 해 볼 수 있지 않겠어?’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첫발을 뗐다. 그땐 몰랐다. 그 시작이 나를 ‘러너’로 만들 거라는 걸. 그때의 마음을 표현하자면 우울한데 설레고 설레는데 우울했다. 먹구름이 드리웠다 걷히고 걷혔다 드리우기를 반복하는 상태. 한 마디로 뭐, 어쩌라고.. 였다.
내 인생에 체육시간도 오래 달리기도 100미터 달리기도 사라진 지 2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서 달린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버스나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가면서 전력질주하는 게 달리는 이유의 전부였다. 가끔씩 조깅을 하는 분들을 보면 ‘왜 굳이, 힘들게…’ 속엣말을 하던, 당최 이해하지 못했던 때였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 목표가 생기니 없던 의욕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난 생각보다 목표에 민감했고,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우선순위를 조정해 가는 사람이었다. 달리면서 알았다. 내가 그런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에 대한 하나의 큰 발견인 셈이다.
인스타에 불어닥친 “미라클 모닝”을 보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이라고 그러다 심장에 무리가 온다고 고개를 젓던 내가 뛰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간단하게 양치와 세수를 하고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른 후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냥 잘까? 지금 너무 밝은데? 뛰고 있으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아냐?’ 하며 갖은 핑계를 대고 있었다. 하루키의 말처럼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p.116)이다. 그런데.. 어라? 내가 달리고 있네?
처음 달리던 날이 생각난다. 2020년 6월, 슬슬 더위가 시작되던 그때. 마스크를 쓰고 달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때라 턱스크를 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발 어느 부위가 지면에 먼저 닿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체의 지식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뛰기만 한 것이다. 마음만 앞섰기에 큰 보폭으로 힘차게 땅을 차며 다리를 뻗었다.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울림, 거친 호흡. 비가 내리듯 쏟아지는 땀방울. 100미터만 달렸을 뿐인데 심장은 자리를 이탈하여 입 밖으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기세였다. 얌체공 같다는 느낌이 드는 내 심장. 너무너무 화가 나거나 놀랐을 때 뛰는 심장박동과도 비슷한 느낌인데 뭔가가 달랐다. 기분 좋음, 힘들어 죽겠는데 기분이 좋은, 내 자신이 약간 변태스럽게 느껴지는 좋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2023년 11월까지 4년을 달렸다. 이틀 혹은 삼 일의 한 번 꼴로, 한 번에 10km씩. 가끔은 하프도 달렸다. 힘에 부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신과 육체가 깨어나는 느낌마저 들었고, 달릴수록 몸은 단단과 탄탄 사이를 오갔다.
맞지 않았던 바지가 꼭 맞다가 헐렁해져 갔다. 타이트하게 맞았던 니트도 맞춤한 듯 이쁘게 맞아갔다. 군살이 사라짐과 동시에 체지방은 무섭게 내려갔고 늘 높았던 공복혈당마저 정상수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쉬이 지치는 체력은 아니었지만 더욱 활력이 넘쳐났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빼고는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다. 더운 여름, 장마, 영하의 날씨와 눈 내리던 날도 뛰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뛰었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늦은 밤에도 뛰었다.
하지만 달리는 건 힘듦의 연속이었다. 경력이 생기면 부담감이 줄어들 거란 생각은 경기도 오산이다. 매번 힘들었고 매번 달리기가 싫었다. 집 문턱만 넘으면 되는데 그거 넘기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다.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추운 겨울엔 따스한 집의 온기가 나를 붙잡았다. 뭐 하러 스스로를 그렇게 힘들게 하냐는 남편의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도 한몫 거들긴 했다. 그런데 또 그 눈빛이 날 달리게도 해 줬다. 꼴 보기 싫으니 내가 나가야지!
달리기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달리면서 하는 생각은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였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달리고 있나. 지금 여기서 그만둘까? 오늘은 달리기 대신 산책을 할까? 그런 생각을 몇 번 한 후에 호흡이 안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생각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다.
그 후부터는 달리는 리듬에 내 몸을 맡기고 (플로우를 탄다고 하지) 달리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눈에 마음에 담고 몸에 새겨 넣는다. 그 계절의 온도, 그 계절만의 냄새, 그 계절에 흘리는 땀의 양까지. 그러다 보면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언제 꽃이 피기 시작했나, 어? 어제는 안 보이던 새싹이 돋아났네? 벌써 단풍이 드는 거야? 어후~ 오늘은 왜 이리 추워.’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꼈다. 주기적으로 달리고 걷다 보면 계절의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당나라 군대처럼 몰려오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단서를 하나하나 흩뿌리고 있었음을 그 단서들이 드디어 맞춰져서 인간이 인지하는 때가 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땐 뭐랄까. 세상은 모르지만 나만 알고 있는 특급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에게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린다.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세 가지 뽑았다. 재능, 집중력, 지속력. 이것은 달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달리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달려보면 안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시기에 달렸지만 달리기에 영 재미를 못 붙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재미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재능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달리기는 지루하지만 수영과 웨이트는 재밌다고. 그 친구는 수영과 웨이트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중력. 이것은 달릴 때 한눈을 파느냐 팔지 않느냐 가 아니라 달리기를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일에 얼마 되지도 않는 집중력을 어느 정도 쏟을 것인가. 이것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다. 한창 달릴 때 새벽 또는 밤 시간을 늘 비워뒀다. 약속이 저녁에 있는 날은 아침에 달렸다. 달리고, 살림하고, 읽고 쓰는 삶. 이것이 그 당시, 달리기를 지속적으로 하던 때의 내 삶의 루틴이다. 굉장히 단순하다. 달릴 때의 집중력을 방해할 것 같은 것들은 일부러 삶에서 치워나갔다. 조금 더 집중하고 조금 더 즐기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면 그다음은.. 이것을 과연 지속할 수 있느냐. 지속력의 여부도 중요하다. 한두 번의 달리기만으로 ‘러너’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내 심장을 뛰게 하고, 힘들어 죽겠는데도 나를 스타트라인에 세우는 것. 그리고 이 짓을 계속 반복하는 것. 이것은 상당한 결단과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타령을 해도, 그 어떤 영화를 보지 못해도 달리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는가가 지속력의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말고!!!!
달리는 횟수가 거듭되고 해를 넘길수록 달리기를 하면 뭐가 달라지냐는 질문을 꽤 받았다.
달리기 전과 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난 겁이 많아 도전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안전추구형으로 살 수밖에.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잘 되기보단 일이 실패할 것을 먼저 생각하는, 그래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마음은 하고 싶은데 실패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실패하면 세상이 끝날 거 같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거 같아 눈치를 보던 사람이었다. 겉으론 쿨 해 보이고 당차 보였지만 속에선 발을 동동거리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달리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자신감이 생길수록, 달리기에 속도가 붙을수록,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난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완주를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란 것을, 달리기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오롯이 나와의 싸움이란 것을, 인생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러니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겁먹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뭐라도 하면 내 인생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없다고, 결국엔 내 삶에 플러스가 되는 일이란 것도 배웠다.
달렸을 뿐인데 난 삶을 배운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을 대하는, 유일한 내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달리기를 하는 동안 배웠고 적용했다.
마녀체력 이영미 작가님도 그러셨다. 운동하면서 체형이 변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멘탈 그리고 유연해진 삶의 태도, 가치관의 변화가 가장 큰 유익이라고. 이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른다.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달리기는 몸의 군살뿐 아니라 생각의 군살도 빠지게 해 주었다.
달리기는 무조건 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운동이든 기본을 제대로 배워야 함에도 이상하게 달리기는 배우려는 생각조차를 하지 않았다. 그걸 왜 배워야 하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작정 달리면 되는 줄 알고 무식하고 무리하게 뛰었다. 무릎을 들고 내딛기만 하면 되는 것을 커다란 보폭으로 땅을 박차고 다리를 뻗었다. 힐스파이크로 (뒤꿈치로 지면을 내리꽂으며 달리는 것) 뛰기를 3년. 왼쪽 발뒤꿈치부터 통증이 시작됐다. 찌릿찌릿을 넘어 발을 디디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날들. 특히나 기상 후 딛는 첫발의 통증이 어찌나 심하던지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절뚝이며 걷거나 그도 어려운 날엔 집안을 기어 다녀야 했다. 그런데도 병원을 가지 않은 미련곰팅이 같은 나. 절뚝이며 30분 이상을 걷지 못하게 됐을 때 ‘병원에 가야 하나?’ 하다 그 주기가 점점 짧아져 1분이 되었을 때 병원에 갈 결심을 하게 됐고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다.
바로 치료를 받았다면 지금쯤은 달릴 수 있었을까. 달려도 달려도 질리지 않는 달리기를 그만두라고 할지도 모를 거라는 지레짐작이 나를 병원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고 그것이 결국엔 나를 달리지 못하는, 한때 러너였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근 일 년 치료를 하고 나서야 발의 통증 없이 걷는 게 가능해졌다. 발 통증 없이 걷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새삼 배우고 느끼고 있다. 몸을 돌보는 것도, 무리하지 않는 것도, 근육을 잘 풀어주고 살살 달래 가며 달려야 하는 것도 러너의 자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달리기 뿐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도.
극한으로 나를 밀어붙이지 않기! 그러다가 즐기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걸 달리면서 경험하게 됐다.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p.128)는 하루키의 말에 동의한다.
하루키의 책을 읽는 내내 달리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나도 한 때 그렇게 뛰었답니다. 어떤 기분인지 잘 알죠 네네.’ 공감과 부러움 사이를 오갔다. 산책을 하다 문득 ‘오늘은 뛰어봐?’ 하다 몇십 미터 가다 멈춰 섰다. 발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게 됐기 때문이다. 전 같았으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을 텐데 이제는 덤덤하다. 마음만 갖고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처럼 매일 달리는 김연수 작가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p.9
그러니 달리지 못해도, 달리지 않아도 좋다. 어떤 결승점이든 내게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환호하고 격려해 줄 이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없어도 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안달복달하지 않을 수 있다.
내 인생의 스타트 라인과 피니쉬 라인의 선수는 오롯이 나이니 난 내 몫의 경주를 즐기면 된다. 경쟁자는 오로지 나 자신이다. 아니 나하고도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즐기면 된다. 세상엔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것, 그 이후에 발생하는 일은 부차적인 일일 뿐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달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깨달음이다. 오늘도 그 깨달음을 안고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선다.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