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MBWA의 추억
무협지를 보면 무림인들이 경지를 논할 때 쓰는 ‘천외천(天外天)’이라는 표현이 있다. 하늘 밖에 하늘이 있는 것처럼,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고수를 만날 때 쓸 수 있는 표현이겠다. 고난이도인 봉고 MBWA를 최악으로 마무리한 후 2주가 안되어 대구 MBWA 일정이 잡혔다.
개인적으로는 박성수 회장의 검소한 스타일을 존경한다. 물론 나 정도 나부랭이가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볼 때 앞에선 절약하는데 뒤에선 사치하는 이중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회장의 동생은 외제차를 이용하시지만, 회장 본인은 평소에도 국내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 다만 전용기나 리무진 차량은 아니더라도, KTX를 타고 현장화를 한다는 건…… 나로서는 보안 문제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봉고MBWA와는 좀 다른 스타일의 배치도가 나온다. 화살표 방향은 물론 열차의 진행방향을 의미한다.
서울역이다. 유명 프랜차이즈 햄버거 브랜드에서 식사를 하고, 열차 시간에 맞춰 타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회장을 포함해 6명이 이동하며 걸을 때, 나는 왜 경호를 배우지 않았는가 후회했다. 회장 옆에 서야 하나? 내가 높은 사람이 아닌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회장 앞에 서야 하나? 내 뒤로 따라오라는 건 무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가다가 길을 잘못 들면 난감할 것 같았다. 탑승구역 잘못 내려가는 것 정도는 나한테 식은죽 먹기니까. 그럼 회장 뒤에 서서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괴한이 나타나면 육탄전을 벌여야 하는 건가. 나 싸움 못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회장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도노조에서 몇 십 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역사 내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순간 회장의 걸음이 멈춰졌다. 많은 기업 총수가 노조를 싫어한다. 그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시위는 특정 기업을 향한 것이 아니었고 이랜드를 향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으며 회장 개인을 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쉽게 말해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 우리 일행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잠깐 멈춰 서서 시위하는 무리를 바라보는 회장의 얼굴에는 화가 드리워졌다. 그 순간 혹여 누군가 회장을 알아볼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일행을 재촉해서 다시 승강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가는 내내 회장의 입에서는 불평이 쏟아져나왔다. 노조는 정말 기업에 도움이 안된다던지, 정말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세력이라던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뒤에서 따라가는 나는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 같았다.
고 신영복 교수님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교도소 내 풍경이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사람의 온기가 반가운 반면, 여름에는 온도가 높아 가뜩이나 불쾌지수가 높은데 사람에게서 나오는 열 때문에 더욱 신경질적으로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일인데,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싫어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출장 등으로 KTX를 종종 이용하곤 했었지만 KTX 앞 뒤 옆 좌석이 그렇게 가깝다는 걸, 집중하면 앞자리 앉은 사람의 숨소리도 들린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다. 졸릴 틈도 없이 긴장한다는 말은 틀렸다. 엄청 긴장해도 엄청 졸리더라. 꾸벅꾸벅, 꿈뻑꿈뻑 하며 내 옆자리 전략기획자와 서로 열심히 깨워주며 오고 가는 길은, 봉고 MBWA와는 또 다른 의미의 고역이었다.
사람이 혼자 확보할 수 있는 거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다. 수많은 성추행이 그 거리를 오해하기 때문에 생긴다. 신체적인 거리를 존중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폭력이다. 또는 정서적 거리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타인에게 집착하거나 간섭 받게 될 수 있고, 반대의 경우 외로워진다. 코로나로 인해 더더욱 우리는 물리적인 거리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랜드에서는 회장에게 컨설팅을 받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컨설팅이 좀 애매한 단어지만, 그냥 좀 어려워하는 상사에게 조언을 듣는 정도로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서면으로 자료를 출력해서 보고하는 대면 컨설팅, 전화로 하는 전화 컨설팅, 동행해서 현장을 방문하는 컨설팅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KTX MBWA는 거리 조정이 매우 어려운 형태로 느껴졌다.
박성수 회장의 검소한 스타일은 출력물에서도 드러난다. 이랜드에서는 디자인이나 광고 시안을 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모든 자료는 흑백으로 인쇄해야 한다. 양이 많은 것도 금물이다. 보통 5~10페이지 미만으로 권장 받는다. 그렇게 해도 여러 사업부의 자료를 모으면 몇 십 페이지에서 많게는 몇 백 페이지가 되는데, 그런 걸 다발로 들고 다니면서 컨설팅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봉고 MBWA를 할 때는 잘 안 보이는 자리에 자료를 숨겨놓고 있다가 관련 사항이 나올 때 짠, 하고 꺼내 보여드리곤 한다.
하지만 KTX에서는 그조차 어렵다. 결국 노트북을 지참하게 된다. 그리고 관련 경영자가 앞, 뒤, 옆에 앉아 있다가 해당되는 사안이 나오면 자리를 바꿔서 회장 옆에 앉게 되는 식이다. 그게 나만 웃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50, 60대 어른들께서 조심조심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바꾸는 모습은 내게는 좀 민망한 광경이었다. 통로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았고, 그래도 일간지나 기업 동향 기사에 나온 적도 있는 분들인데 누군가 알아볼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봉고와 KTX를 이용하는 MBWA를 통해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조절에 대해서, 그리고 권위의 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