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던 중의 단상 하나
논문과 씨름하다 잠깐 생각해본다. 1960년대 사르트르가 주장했던 '앙가주망'은 간단히 정리하자면, 문학을 통한 사회참여나 사회참여적 성찰을 통한 문학활동에 의해 문학이 세상을 바꾸길 꾀하는 것과 동시에 자아를 완성하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그런 얘기였다. 개인적으론 사르트르를 연구하면서 그가 매우 존경스러웠다가 매우 실망했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의 강남좌파였는데, 그를 배부른 펜대 굴리기를 통해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가짜 진보라고 섣불리 정의할 순 없으나 그런 식의 혐의는 영원히 벗기 힘들어 보인다.) 하나는 철학의 존재론적 의문의 한계에 용감한 선을 그었다는 점이었고, 하나는 결국 자신의 사상이 다분한 사회주의적 노선에 기반되기 위해 선동의 기폭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고로 문학은 당연히 사회참여를 꾀해야 하고 그것이 예술활동을 통한 일종의 자아실현(계몽적이고 처세술적인 의미에서의 실현이 아닌데, 마땅히 대체할 말이 없는 듯.)에 가깝다는 것인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를 했던 이유는 사실 문학이라는 매체 자체가 사회에 어떤 힘을 발휘하지 못한단 뜻이기보다는 문학이 사회를 바꿀 수 없는 현대의 사회 구조 자체를 탓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수영 시인은 6.25 전쟁, 포로생활과 사사오입 개헌, 장면 정권의 무능함, 4.19, 5.16 등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비극들을 모두 겪고 죽은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술도 민중도 생명도 어떤 의지도 부정과 탐욕 앞에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에 학계에서 흔히 '불온시'라고 형용하는 어떤 시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고 이는 실존주의의 영향을 한 몸에 받은 시인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그와 동시에 생각과 예술 같은 걸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던 무력감 속에서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을 것이다.
김수영과 이어령의 참여 시 논쟁을 통해 얻은 결론으로서의 김수영 시 세계는 시를 통한 어떤 사회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이것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로 설명되었을 것이고, 이는 '온몸으로' 벌이는 처절한 문학활동은 당연지사 결국 사회참여적 특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 귀결될 수 있어서 사르트르가 논했던 앙가주망, 즉 문학은 상기한 특성을 띠어야 한다는 생각과의 근본적 차이가 생긴다. '온몸으로 쓴 진실로서의 문학은 그 자체로 사회참여이다', 라는 가치와 '문학은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앙가주망을 개진하여야 한다'는 가치의 차이랄까. 나는 아직 어떤 것이 옳은지는 두 가지 층위에서 잘 모르겠다. 김수영식 사고로는 현대문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목소리에 천착할 위험이 있고, 그런 악순환이 문학과 사회의 무관성을 연속해서 조장할 수 있다는 점과, 문학이 사회참여적 특성을 위해서 쓰인다면 문학은 그 본질이 왜곡되거나 사라지거나 한정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잘못되고 있고, 모든 것이 불온해지고 있고, 모든 것이 왜곡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요즘, 나는 예술의 가치와 정치성이라는 이 불온한 중의적 유령에 대해 생각한다.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통계 수치로 개념화할 수 없는 인문적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수많은 정치적 문화적 오류를 생산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자체가 랑시에르가 정의한 언어적 ‘불화’ 개념의 최종 보스 격이다. 예술이 어쩌면 바로 그 적점에 위치할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민생이란 단어 자체를 상실한 사전처럼 기득권은 개인적 차원의 욕구를 위해 사회적 가치와 인간존중까지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유구하고 훌륭한 전통을 지키고 계승해나가자는 의미인 '보수'와는 전혀 동떨어진지는 오래되었다. 또한 피해의식과 왜곡된 사회와 정보와 여론에 너무도 쉽게 현혹되면서 힘든 현실과 부당한 사회의 모든 책임을 기득권이라는 피상적이고 막연한 적대적 대상에게 뒤집어씌워 마땅한 대안도 없이 사회의 혼란을 꾀하는 ‘진보’라는 허울들은 변화와 타협을 통해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진짜 '진보'와는 도무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문학은 앞으로 무엇을 얘기해야 하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뭉칠 수도 흩어질 수도 없는 '족속'들에 묻힌 이 침묵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다 할 진통제도 없이 암 말기처럼 죽어가는 사회를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을까.
-박사논문 집필 중에. 2014.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