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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성훈 Jan 15. 2020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예술 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

     

 신문 칼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는 세 가지’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였고, 두 번째는 ‘북한과의 현 대치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였고, 또 하나는 ‘중국과 일본이 얼마나 거대한 나라인지’였다. 나는 문득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는 것. 그것은 현시점에서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확립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주제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것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찾아가는 것이 좋을까.     

 

 위의 신문지상에서 나오는 물음에 언급된 우리 옆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일본을 잠깐 짚고 가자면,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라지만 둘 사이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사고가 확실하거나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는 것, 즉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생각이 크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진나라 이후부터 통일된 ‘하나’라는 개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그런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이나 정부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좋은 예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기치였기 때문에, 다문화 다민족의 거대 대륙 국가인 중국에서 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들 수 있다. 대만을 끝까지 집어삼키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상황이나, 티베트 민족운동을 잔악한 학살로 진압한다거나, 최근의 홍콩 사태나 시진핑의 중국몽 노선 노골화 움직임 등은 이런 차원에서 명확하다. 가령 조선시대의 우리나라도 속했던 조공 제도의 경우, 통일 중국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는 이민족 지역의 자유와 자치권을 허락하는 대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만 해주는 일종의 봉건적 평화조약인데, 중국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이민족 지역이 중국 황실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통일된 국가를 유지해왔으므로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터무니없을지 모르지만, 조공을 바치던 조선 또한 그들에겐 속국 개념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우리가 늘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를 해 왔고, 지금도 그런 거만하다면 거만한(?) 생각이 유구한 역사와 오랜 문화를 가진 중국을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연구와 서적들이 대단히 많다고 한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던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예부터 지대하다. 그것에 대한 생각을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신화적 해석의 관점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서양열강의 출현으로 보는 근대사까지 세계무대에 별다른 이름을 내지 못하고 동북아 구석에서 오래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왔던 특이한 사학적 관점에서 풀기도 하고, 막부 중심의 오랜 무가 정치에서 비롯된 국민들의 이중적 의식세계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것이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하거나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모든 것이 너무 많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결국 하나의 실존으로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세계에 ‘나’를 존재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는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합이고, 고로 ‘나’는 어떤 사건으로서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태어남과 동시에 과거가 되고, 나의 과거는 나의 정체성이 된다. 이는 곧 나의 진정한 ‘살아있기’ 일 지도 모른다. 한번 물어보자. 과연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해보자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별다른 물음을 갖지 않고 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어떤 일을 당해도, 세계 어디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굳게 모여 큰 힘을 발휘하고, 지켜내고, 이겨내어 왔다.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우리만의 어떤 정(情) 의식과 민족적 근성은 분명 존재하고 단단한 결속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에 맞먹을 만큼이나 우리는 우리 과거와 우리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문제는 그 나라사랑의 이유가 되는 가치의 차원이다. 역사와 사관이 대체로 뚜렷이 정립되어있지 않고, 과거와 전통과 우리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계승에 대한 의식이나 자부심이 매우 낮다. 이것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나라의 민족적 자부심이 ‘우리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에 있기보다는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지켜내어 여기까지 왔는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는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는 외침과 희생의 역사로 많이 형용될 만큼 고되고 어려운 과거를 겪어왔고, 양극단 저인 지정학적,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끊임없이 부딪혀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꽤 강한 피해의식과 불신 , 그리고 양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고, 타협이 매우 어려운 기질이 굳혀져 왔다. 사학자들은 발칸 반도의 국가들이 우리나라와 사학적 위치와 민족성이 유사한 것을 근거로 들며 이를 반도적 기질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꽤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는 ‘싸워내고’, ‘지켜내는’, 즉 ‘살아남는’ 일에 가까운 역사가 대부분이었기에,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생각이 크게 작용하는 반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혹은 ‘누구’인지에 대한 관점으로서의 민족적 사고가 부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끈질긴 생명력과 근성으로 우리의 가족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오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 같은 뜬구름 잡이 화두 같은 물음이 당시부터 무가치해 보였음은 당연한 이치였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먹고사는 일’이 급한 현실 속에 살아왔고, 그 속에서 정체성이나 민족의식 등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나 특별한 계층에서나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치적, 문화적, 외교적 불안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의 무전 통성 속에서 사상적 혼란을 겪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고유의 유구한 전통과 많은 문화가 자랑스럽게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전통이 우리를 ‘어떻게 살게 하는가’에 대한 생각만을 돕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와 같은 다소 철학적 화두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게 하지 못한다. 근현대사 전반 동안 대규모의 비극적 전쟁을 많이 겪어 전통적 문화의 맥이 여러 번 끊어지고 서구 사상과 문화 등을 받아들여 속히 재건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상황이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불씨를 완전히 꺼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비극은, 이제 이런 모습으로 천천히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으며 절실하다. 필자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늘 보여주었던 끝없는 분열들(북인/남인, 동인/서인, 훈구/사림, 노론/소론, 소윤/대윤, 여당/야당 등)을 진정한 화합이나 타협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사학적, 혹은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누구인지 파악하자는 일이, 국수주의나 왜곡된 내셔널리즘으로 흐르도록 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지나친 국수적 관점은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우경화를 부를 수 있고, 왜곡된 내셔널리즘은 경박한 가짜 정체성과 새롭고 끝없는 분열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자각과 인식을 통해서만 동물과 다른 존재로서 구분될 수 있다. 그것은 정체성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고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말해준다.     


 나는 이것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나 예술 활동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문화’라는 개념은 그렇게 거대하거나 대단한 개념이 아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기 세계의 창조나 개진이 ‘예술’이라면 민족이나 대중 등 어떤 동일성을 가진 집단 대다수의 차원에서의 세계 창조를 ‘문화’라 부른다. 우리는 현대에도 이것이 없는 집단을 ‘족(族)’이라고 부르고 그들만의 문화가 있는 집단을 ‘국(國)’이라 부른다. 즉, 예술은 모여서 또 다른 문화가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든다. 유럽의 최강국은 보통 독일과 프랑스로 귀결된다. 독일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수준 높은 예술세계와 문화적 가치 지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프랑스는 예술을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프랑스가 유럽의 최강국으로 오랜 역사 동안 군림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나 화력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우월성 때문이었다. 인문과 철학의 싶은 성찰과 사유는 곧 예술적 가치의 원천이 된다고 보면 독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과거를 돌이키고 지켜내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혹은 ‘우리’가 있기 위해 중요한 것이다. 그 해답은 어쩌면 예술뿐인지도 모른다.     

 

 예술에도 물론 문제는 있다.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개념인 이상, 예술에도 옥석이 있고 진짜와 가짜가 있을 수 있고 자본을 가장한 예술은 없어도 예술을 가장한 자본이 있으며 순수한 예술 그 자체는 저급 취급을 받긴 힘들지만 자본이나 욕망 혹은 복제가 개입한 ‘가짜 예술’은 예술에도 저급의 개념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은 개인의 욕망이나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태어난, 순수함으로써의 자기 세계 개진을 뜻한다. 사변 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익히 ‘니체’를 알고 있고, 그의 책에 감탄하며 지금까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영원회귀’라는 자신만의 개념을 통해 모든 사람의 초월적 세계 개진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곧 예술활동을 의미함을 확신한다.      

 우리는 복잡한 정치상황과 복잡한 외교적 이권, 그리고 복잡한 이념갈등의 첨단에서 허우적거렸고 지금도 그 속에 있다. 바른 정치도, 강한 안보도 넉넉한 경제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 주지는 못한다. 돼지는 배가 부르던 고프던, 크던 작던, 강하던 약하던,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다. 문화와 예술을 알고, 만들고 향유하는 돼지는 없다. 우리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며 오랜 세월 지켜온 것이 ‘돌멩이’가 아니라 ‘진주’였다는 것을 확인받을 수 있다면, 그 자부심과 정체성은 얼마나 더 커질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진주는 조그만 돌멩이부터 시작된다는 것 또한 자명한 것이다. 그것이 오래되었든, 다소 늦었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나는 우리 모든 사람이 단순히 예술을 흉내 낼 것이 아닌, 자신만의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갖길 바란다. 그것이 모여 어떤 형태로의 우리만의 유구한 ‘문화’의 형태를 창조해 나갈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는 누구인가, 에 대한 해답에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우리’에 대한 정체성은 지배자 혹은 권위자 누군가가 나타나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가진 개별적 가치들이 모여 위대한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국가를 위해서 예술활동을 하라는 폭압적 권고 차원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찾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사유와 예술활동으로 연결된다면, 그 작은 정체성들이 모여 나아가 범국가적 차원에서의 단단한 우리를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예술에 삶을 걸고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화두에 도전하는 숭고한 이들이고 존중받아야 하며 그럴 가치가 있다. 우리는 오늘도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는 모든 정체성의 시작이며, 예술의 시작이고, 세계의 시작이다.     


-미발표. 2014년 1월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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