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히레사케(태운 복어지느러미를 넣은 뜨거운 청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본래 저급한 청주에 향과 운치를 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지만, 일반적인 도쿠리 청주와는 그 은근한 향미의 차이가 있고, 또한 그 특유의 운치가 있다.
한 번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그런 상상을 했다. 쌀을 빚어 만든 청주에 불 그을린 생선 지느러미를 넣어 마실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던 것은 분명 '고안'이 아니라 '우연'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라고. 누군가 술안주를 뜯어먹거나 복어 요리를 준비하다 지느러미를 술잔에 빠뜨렸을 것이다, 라고.
시를 공부하고 쓰는 사람들끼리 즐겨 남용하는 표현으로 ‘뮤즈(Muse)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정말 뮤즈일 수도 있고 디오니소스일 수도 있고 장군보살일 수도 있고 정신병리학적 증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생산의 결과물이 이성과 논리로서는 창조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 시는, 뜨거운 청주에 불에 탄 복어 지느러미를 빠뜨리듯 탄생하는 어떤 것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그분’이 오셔서 예술적, 시적 영감을 얻어 수직적으로 그 발화를 써내려갈 때 대개 아름다운 시가 만들어진다는 것과, 시를 ‘기획’하거나 ‘제조’할 때와는 사뭇 다른 영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차원에서 나는 히레사케를 만든 그 누군가에게 찾아온 것 또한 우리가 얘기하는 뮤즈 아니었을까? 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베케트는, “시를 쓰는 일은 아무도 실수할 수 없는 일을 실수하는 일이고, 그 실수를 시인하는 일이고, 결국 그 실수가 우주임을 아는 일”이라고 했다. 세속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상어가 아닌 차원에서의 언어에 영혼과 사유를 기대는 일은 명백히 ‘실수’에 가까울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고백이며, 실수의 한 낯선 형태이다.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과연 이것이 정말 실수일까?
잔에 손을 데우며 생각한다. 내 실수를 시인하기 위해서든 어떤 새로운 실수를 위해서든 술을 마시다가도 어떤 실수를 할 수 있다니. 또한 그 실수로 더 맛있고 향기로운 결과물을 창조할 수도 있다니. 분명 처음 그렇게 한 사람은 최소한 시인이었거나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시인의 시각에선 진정한 의미의 실수란 없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의 새로운 우주였을 대상을 온몸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술꾼도 못되는 내가 새삼스레 이 술이 좋기도 했던 듯하다.
생각건대 시도, 예술도, 삶도 그 자체가 우연은 아니지만 기획되는 것 또한 아니므로, 시는 그 사유와 우연 사이의 아름다운 결이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시는 운명 같은 것.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운명'같은 추상명사 또한 필연인지 우연인지 알 길은 없겠지만, 머리 아프고 힘겨운 어떤 삶이 '대포 한 잔'으로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어찌됐든 이것은 우연에 좀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우연에 가까울 것이고, 나의 시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래서 늘 당신,이라는 존재들에게 감사한다. 술이 유난히 따뜻한 날이 있었고 앞으로도 꽤 많이 있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그렇게 우연한 시를 필연적으로 쓸 것이다. 그러다 다만 홀연히, 우연에 가깝게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계간 POSITION. 2015. 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