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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성훈 Nov 25. 2022

『사물들』- 1. 우산

우산          


정형외과


 비가 온다. 칠십이 넘으신 아버지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시던 날, 무리하다 엉치에 통증이 생긴 어머니가 누워계시던 날, 발을 한 번 헛디딘 할머니가 병원에 가신 날. 언젠가 비가 오면 홀연히 나도 이유모를 무릎 통증이 찾아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내가 처음으로 나이를 먹었다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그것은 우천과 관계하고 있는 것 같다. 엄마, 할머니는 왜 맨날 비만 오면 무릎이 아프대? 하고 물었을 때 엄마는 ‘나이가 들면 비가 무릎에 내리나보다’하고 대꾸해 주었고 이제 할머니가 된 엄마는 본인의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마에 비가 올 때는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러 나가 그 속에서 뛰어놀곤 했고, 눈에 비가 올 때는 애인과 카페에 앉아 비가 오는 것을 구경하곤 했고 가슴에 내릴 때는 방구석에 눕거나 앉아 빗소리만 듣곤 했다. 엄마, 그 이후의 비는 내 무릎에도 내리게 되겠지? 나는 묻기 껄끄러운 의문을 주워섬기며 지금껏 허투루 나이를 먹고 있지만, 나도 비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고 싫어하던 때가 있었고 오건 말건 상관없는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모든 때이기도, 아무 때도 아니기도 하지만, 비가 찾아올 때마다 우리에게 대개 부담스러운 것들을 몰고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평생 어릴 줄 알았던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일기예보를 점점 자주 보면서, 잘 맞지 않는 우리나라 기상대의 솜씨를 함부로 조롱하면서. 어른이 되었건 아니건, 나이가 들었건 아니건 누구나 날씨와 관련해서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나는 이제 그 돌아본 이후의 빗속을 걷고 있다. 비가 주는 부담스러움과, 비가 수거해가는 시간들과, 비가 들려주는 걸음소리 아래서 우리는 잃어버릴 모든 사물처럼 우산을 받쳐 든다. 끙, 끙. 여기저기 들려오는 가벼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면서, 병실 린넨을 털듯 각자의 녹 슨 댓살을 털면서.  

             

유실물 보관소     

 나는 예부터 지금까지 유난히 우산을 잘 잃어버리고 있는데 비가 올 때마다 늘 세 번의 망각을 겪는다.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대중교통이나 약속장소에 우산을 두고 나왔음을 깨닫고, 잃어버린 우산을 새로 구입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 우산을 구입한 후에는 위와 같은 망각이 다시 반복된다. 나는 좋은 우산을 갖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그런 우산을 가져도 보았지만 항상 잃어버리기에 그건 낭비일 뿐이었다. 요즘은 편의점 등에서 파는 일회용 우산도 옷감으로 되어있는지 비닐로 되어있는지 헷갈릴 수준으로 깔끔하게 나오는데다 매우 저렴해서 나는 요즘 그런 것을 사용하고 있다. 한 편으론 이런 합리적인 물건이 나오는 이유도 나 같은 사람이 매우 많이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세상엔 딱히 고귀하지 않거나 비싸지 않기에 더 가치 있는 사물도 많은 것 같다. 우산은 사람이 가장 잘 잃어버리는 사물 중 하나이기에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우산이라는 물건은 비쌀 이유가 전혀 없다고 여기는 쪽이다. 오히려 너무 값진 것이라면 절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모두가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물의 여러 가지 특성상 그래야 할 명분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하철 유실물 보관소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물건이 가방과 우산이라는데, 비온 후에는 우산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다. 그중에는 내가 잃어버린 우산도 몇 묶음은 되겠지. 사실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일 년 내내 항상 들고 다니는 사물이 아니다 보니 대개의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있는 상황보다 없는 상황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직접 알아본 바는 아니지만 영국처럼 언제든 비가 내려도 이상할 게 없는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산을 그리 쉽게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원래 없었던 것인 듯, 이곳의 우리는 좌석에 우산을 두고 내리곤 한참이 지난 후 씁쓸한 웃음처럼 잠깐 떠올리기도 할 뿐. 그때 사람들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음’을 통해 상실과 상처로부터 보호받는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저 ‘덜 소중한’ 것으로 여기기로 한다. 그래야 내가 버틸 수 있으니까, 그것은 너무 요긴하고, 소중하고, 잃어버리기도, 잊어버리기도 쉬운 거니까. 우리에게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의 곁을 지켰던 수많은 ‘당신’들처럼. 대개의 우산은 받쳐 든 기억보다 잃어버린 기억이 더 많을 정도니까. 이정도면 이 아픈 사물은 비를 피하기 위해 태어나 잃어버리기 위한 쪽으로 기울어가는 친구다. 추억을 잃어버리는 게 반복되면 잃어버림 또한 추억이 될 테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이 번거롭고 아름다운 유실물이 양가 모두에 걸쳐져 있음을 본다.                   


호우주의보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꼭 비가 왔고 약속하고 싶으면 비가 오는 그런 인연이 있었다. 당신이 그 옛날 밤의 교정에서 우산을 쓴 채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때와 내가 준 우산을 들고 내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집스럽게 떠나던 때의 중간쯤, 나는 잃어버린 우산과, 되찾은 우산과, 똑같은 것으로 다시 구한 우산과, 되찾았다가 다시 잃어버린 우산을 모두 꺼내본다. 어느 덧 우리는 우리의 유실물을 추억하면서, 우산을 잃기보다는 유실물 보관소를 잃어버리는 쪽으로 돌아서 있다. 기억도 시간도 사물도 더 이상 되찾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나는 사랑하던 이에게 ‘자유’에 대해 들었다. 그건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대. 나는 그의 우산 쪽에서 끄덕였지만 꼭 그렇진 않다고 생각했었다. 너에겐 자유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을까. 너는 네가 받쳐 들고 있던 우산을 잃어버렸고, 나는 그날의 유실물 보관소를 뒤지고 있었으니까. 너는 우산 같은 게 뭐가 중요하냐고 쉽게 말했지만 그 날 내게 우산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던 시절과 모든 것이 의미인 시절 속에서 나는 아직도 모든 게 어색한 듯 비를 맞고 있다. 내겐 그것만이 자유일 수 있었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우산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말을 하면서 혼자 김밥집을 나설 때. 내 멀쩡한 일회용 우산이 고장 난 고급 우산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았고 불쾌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되돌아가지 않았고 비 내리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쉬 그치지 않았으니까. 돌이켜 보면 모두 우산 때문이었다. ‘강수확률이 몇 %지?’라고, ‘내일은 맑겠지?’라고 응원조로 말하면서 나는 옛 인연에게 몇몇 비 오던 날만 돌려주고 싶었고 그때 우산 이외의 모든 건 전부 내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유실물 같은 새 비닐우산을 좌판에서 볼 때마다 괜히 만지작거리곤 하는데, 아무리 사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우산을 씌워주면서, 비는 결별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의 말은 대답처럼 혹은 우산을 잃어버린 후처럼 젖어있었다. 자유롭기 위해선 자유를 잃어버려야 했으니, 그날의 일기도 우리의 결별도 빗속에선 모두 웃기는 일이었다.


 너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나는 왜 그것들을 반복해서 잃어버렸을까. 날씨가 궂고 나서야 생각한다. 우산은 한때 내가 잃어버린 모든 사물이고 모든 기억은 결국 아직 친해지지 못한 우산들처럼 사라져 가겠지. 호우주의보가 회상도 후회도 아닌 모습으로 내린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곳에서 씻기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도 인칭의 형태로 비를 피하고 있을까. 잠금장치가 고장 나 둘둘 감기지 않는 우산을, 나는 활짝 펴 말리고는 또 잃어버릴 거라 스스로 예보했다.


         

기념품     


 성격이 구식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래된 가재도구를 추려서 버리는 건 내겐 늘 어려운 일이다. 이사를 하고 창고를 정리하면서, 엄마에게 여쭤봤더라면 분명 처분을 반대하셨을 듯한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거의 멀쩡하지만 지나치게 낡았거나 쓸 일이 없거나 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물건들이었다. 죄 짓는 것 같기도 했지만 회생불가한 먼지투성이 과거에 현재가 끌려가는 것보단 약간의 잘못을 택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금이 간 커다란 다라, 시래기 말리는 소쿠리부터 누렇게 바랜 옷가지들까지 온갖 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런 물건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양산이었다. 양산이라니. 그런 단어의 의미나 존재도 잊어버릴 정도의 물건들이 예전에는 매우 많이 있었지. 물론 양산,이라고 부르고는 모두 우산으로 사용하는 물건이었지만 그때는 그 촌스러운 체크무늬의 2단 우산 닮은 것들을 꿋꿋하게 양산이라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걸 굳이 양산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지금도 양산과 우산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리고 이를 돈을 주고 구입해 본 적도 없었다. 창고 구석에 여러 개 처박혀 있던 그 물건들만 해도 모두 결혼식 기념품이었는데 하얀 종이상자와 플라스틱 손잡이에 ‘OOO, OOO 결혼식 기념’ 등의 글씨까지 박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 누가 없앴는지, 언제 누구부터 잊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에는 주로 하객들을 위한 기념품으로 양산을 많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들이 있어서 어렸을 적의 나는 내 우산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비가 오면 결혼이 늘 어른의 일인 줄만 알던 채 누군가의 결혼식 기념품으로 받은 어른용 양산을 쓰고 학교에 갔었다. 딱히 일부러 추억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가끔 꿈에 보이기도 한다.     

 십 수 년 만에 고향에 갔을 때, 우산이 없는 채로 비를 만났다. 유치원 때 엄마를 따라 미사 보러 갔다가 지겨워 바깥 공터로 도망 나와 놀면서 기다리던 성당이 부산탑 아래에 3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버려진 우산 하나를 주워 썼는데 펼쳐보니 그것은 양산이었다. 아직도 이런 게 있었다니! 이것의 전 주인은 분실했을까, 유기했을까. 추억했을까, 얽매였을까. 그런 생각 속에서 한 번 심하게 젖으면 비를 점점 막지 못하게 되는 그 녹슨 친구를 나는 서울까지 가지고 왔다. 사물이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니 기억에 얽매여 있었던 것은 그저 나였구나. 사물은 생생한 기억 그 자체이기에 의미 그 자체이기도 할까. 나는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구나 생각하면서 그 옛날 젊은 엄마가 성탄절 선물로 사준 책,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과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구입했던 그 성당 성물점을 기웃거렸다. 그 아름다운 책들은 모두 가톨릭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던 것들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그리고 사물과 사람은 누가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가 아니구나, 하고 나이 먹은 나는 생각했다. 미사를 보는 엄마를 기다리며 초등학생 누나와 숨바꼭질을 하던 성당 공터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미 문화원 앞에서 전투경찰대가 매캐한 최루탄내 씻겨주는 빗속에 우직이 앉아 라면을 먹던 모습을 떠올린다. 유년 한 구석의 유실물 보관소. 내 가족이 떠나고, 내가 떠나고 외할머니가 떠난 그곳에서 나는 행복한 추억 한 자루를 주워 열차를 탔다. 아무도 우산이 없었고 모두 우산이 가르쳐준 풍경들이었다.       

 물려 쓰던 신발주머니, 폐품 수집으로 가져가던 신문지 한 봉지, 그리고 기념품 양산을 들고 고인 물웅덩이를 피해 등교하던 그 아이를,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아이를 성당에서 만났을 때. 대개의 사물들은 과거에 대해 추억케 하기도 얽매이게 하기도 한다는 걸 느꼈고 나는 한때 얽매여 있는 쪽을 더 행복해했다. 추억케만 하는 사물은 무심하게 보관되고 얽매이게 하는 사물은 소중하게 버려지겠지. 우산은 전자와 후자 모두였고 도무지 쓸 수 없다는 점에서 전자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선물로 받은 유실물은 버리지 않기로 한다. 잘 말려 금에 맞게 잘 접어 돌돌 말아둔 양산을 지금껏 쓰고 있던 그 아이에게, 언젠가 그 아이의 아이에게 새 우산을 사 주기로 했을 뿐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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