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룰레 아주머니와 처음 만나 나눈 인사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살게 될 우리 집은 타운하우스 제일 끝 집. 옆 집은 한 집 밖에 없었다. 차고 앞을 걸어갈 때마다 긴장했다. '옆집 사람들하고 인사는 한 번 해야 할 텐데 인종 차별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최대한 서둘러 집에 들어오곤 했다. 며칠 되지 않아 차고 앞에서 옆집에서 나오는 아주머니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잔뜩 긴장했던 내가 무색하게 친절하게 인사하시는 아주머니. 일단 안면을 텄으니 다행이고, 좋은 이웃 같아 안도했다. 다시 며칠 후, 현관문 앞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주머니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서 동네 구경하겠냐는 내용. 처음 인사할 때 동네 마트 알려주시겠다고 한 게 빈 말이 아니었다. 이런 감동이라니.
돌아올 때까지 나를 Yung으로 부른 아주머니
그렇게 아주머니 차를 타고 며칠에 한 번씩 트레이더 조, 홀푸드, 웨그만, BBB, 마셜 같은 마트와 쇼핑몰을 다녔다. 나한테 잘해줘도 잘 안 맞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머니는 신기하게도 음식, 환경.. 무슨 얘기를 해도 나랑 죽이 척척 맞았다.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외교부에 근무하셔서 3년씩 여러 나라에서 살다가 7년 전에 돌아와 정착하셨다고. 그러면서 타지에서 얼마나 외로운지 잘 안다며 나한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거다. 장 보면서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망설이는 치즈를 아주머니가 한 봉지 더 사시면서 먹어보고 안 맞으면 나머지 자기 달라고 나눠주시기도 했다. 내가 여행하는 사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아마존 택배를 아주머니가 보관해주시기도 하고, 낙엽 치우는 블로어를 빌려주시기도 했다. 매일 문자를 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바쁘게 지내다 몇 주 만에 뜬금없이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가 되었다. 한국에 살면서 이웃과 가까이 지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잘 통하는 옆집 친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은.
내가 제일 감동했을 때는 Thanksgivig 추수감사절 날. 우리 가족을 초대해주신 것도 감사했는데 그 날 초대하신 친구들이 전부 한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주머니 아저씨와 제일 친한 부부는 아저씨가 일본계 미국인 (같은 아시안), 어머니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어를 조금 아는 사무실 직원, 80년대에 한국에서 근무한 적 있는 나이 많은 군인 아저씨 부부. 처음엔 '어떻게 다 한국이랑 연관 있는 사람들이 많지?' 하고 신기하다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을 배려해서 일부러 그렇게 손님들을 초대한 거였다. 그냥 조용히 집에서 보낼 땡스기빙이었는데 아주머니 덕분에 늦게까지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집으로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원 다니고 있는 20대 딸을 초대했다. 아저씨는 한국 음식 중에 불고기를, 아주머니는 채소전과 잡채를 제일 좋아하셨다. 특히 잡채를 엄청 좋아하셔서 이후에 몇 번 해서 따로 드리기도 했다.
(잡채는 아주머니 초대하느라 내가 난생처음 만들어 본 음식이다. 잡채 장인인 동생에게 카톡으로 전수받은 레시피가 한 몫 했다.) 아주머니는 동생이랑 조카들이 봄에 3주 동안 같이 지낼 때 집으로 초대해주시고, 여름에 갑자기 우리 차가 고장 났을 때 30분 걸리는 아이들 렉센터 (문화센터)까지 차로 데리고 와주시기도 하고.. 고마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주머니랑 나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얘기하다 보면 나이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아저씨와 사이좋게 사시는 모습을 보며 배우는 게 많았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1년 동안 살 집에 왔더니 보물 같은 친구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1년이 거의 다 되어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 우리는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시애틀로 가서 일주일 정도 여행을 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집 떠나기 전 날 아주머니가 오후에 차나 마시자며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평소처럼 얘기하다가 저녁때가 되자 저녁도 간단히 먹고 가라고 해서 저녁까지 같이 먹었다. 이불을 짐으로 부쳐버려서 덮을 것을 빌리려니 손님방에서 자라고 하시는 걸 이불이랑 냄비만 빌려왔다.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식구들이 잠든 후 텅 빈 거실 바닥에 엎드려 아주머니에게 카드를 썼다. 고맙고 아쉬운 마음을 전하려니 계속 눈물이 나와서 카드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눈이 탱탱 부은 상태로 끊임없이 나오는 짐을 싸고, 버렸다. 휑한 집을 사진으로 남기고, 잠시 함께 지냈던 동생에게 집 사진을 보냈다. 동생이 서운한 마음에 바로 전화를 했는데.. 그때부터 눈물샘이 터져서 멈추지를 않는 거다.
선글라스로 빨간 눈을 가리고 아침 일찍 우리를 배웅하러 오신 아주머니, 아저씨를 만났다. 같이 이불을 옮기고 차에 가방을 싣고... 이젠 정말 헤어질 시간. 차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데... 결국 아주머니와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그렇게 울기만 하면서 헤어졌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난 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가.) 시애틀행 비행기에서 내내 울고, 시애틀에 도착해서 아주머니한테서 문자 주고받다가 울고, 여행 잘하다가 생각나면 울고... 며칠을 그렇게 눈물샘이 고장 난 듯 울었다. 아주머니도 계속 운다고 하셨는데 아마 나보다 더 허전함이 더 컸을 거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아있는 사람이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니까. 지금도 가끔 양파가 딱 한 개 모자를 때나 잡채를 보면 아주머니 생각이 난다. 옆집에 살면 참 좋을 텐데. 아주머니도 왓츠앱으로 가끔 문자를 주고받을 때 '네가 여기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로 마무리한다. 헤어질 때 '마지막' 저녁이 아니라고 약속했던 것처럼 몇 년 안에는 꼭 다시 가서 아주머니, 아저씨를 만나고 싶다. 그때는 밝게 웃으면서 만나고 조금만 울컥해하면서 인사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