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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릿한 달팽이 Nov 30. 2020

엄마는 나에게

가벼운 모녀 이야기 1부

예전에 친구 카톡 프로필이 바뀐 적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옆에 있는 문구는 ‘나의 정신적 지주, 에너지’.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정신적 지주에 에너지의 원천이라니. 잘못된 건 없는데 낯설고 어색하다. 별로 안 친한 사람이 스스럼없이 나한테 팔짱을 끼면 이런 느낌일까. 엄마에게 맺힌 게 많거나 엄마와 사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엄마는 나한테 꽤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엄마는 무던함과 무심함 중간 어느 즈음에 있는 사람이다. 간호사였던 엄마는 내가 아기일 때 나와 연년생 동생을 아침저녁으로 친할머니에게 맡기고 데려오는 생활을 하다가 관련 공기업으로 직장을 옮겨 20년 가까이 일했다. 먼 기억 속 엄마는 퇴근 후에 피곤해 보일지언정 힘들다고 얼굴 찌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우리에게 애정표현을 많이 하는 건 아니었다. 주로 우리가 바쁜 엄마 뒤를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묻고 얘기하는 식이었다. 엄마는 할 일 하면서 무심하게 대답해주고. 


엄마의 무심한 성격은 남달랐다. 사춘기가 극에 달했던 중학교 시절 나는 아빠랑 참 징글징글하게 많이 싸웠다. 같이 뉴스를 보다가 내가 기어이 먼저 시비를 걸었고, 나랑 똑같이 따지기 좋아했던 아빠는 거기에 말려드는 식이었다. 결국 집이 떠나갈 듯 난리가 나고 아빠가 힘으로 나를 제압해야 마무리가 됐다. 내가 엄마였다면 안 보이는 곳에서라도 양쪽을 중재했을 법도 한데, 엄마는 늘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둘이 똑같아.” 하면서 쏙 빠졌다. 엄마는 나한테 학교 생활이나 친한 친구들에 대한 걸 물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써서 응시할 때도, 대학교 원서를 쓸 때도, 취직하고 결혼할 때도 내가 전부 알아서 했고, 엄마는 늘 나한테 공지를 받는 식이었다. 나는 그렇게 혼자 다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서운한 마음도 전혀 없었고.


엄마의 무심함과 엉뚱함이 제대로 드러나는 사건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수능날 아침에 있었던 일. 수능 보던 날 아침 수험생인 나에게 엄마는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줬다. 미신 믿지 않는 집이었지만 웃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엄마, 나 오늘 수능이야. 근데 미역국을 끓여줬네?” 하니 엄마는 그제야 전혀 생각 못 했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이라 끓여준 거라며 씩 웃었다. 


두 번째는 파주 버스 해프닝.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원 없이 놀았다. 돈독한 과 동기들이 너무나 좋았고, 과나 학회, 동기들 술자리에 최소 11시까지는 남아있느라 평균 귀가 시각은 1시 안팎. 일산에 지하철이 없던 시절이라 좌석버스를 중간에 갈아타느라 편도 두 시간이 걸렸다.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엄마, 아빠는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고, 나도 덕분에 마음 놓고 늦게 들어갔다. 귀가 시간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초저녁에 들어가면 어쩐 일로 일찍 오냐며 의아해하셨다.


대학교 3학년 때였나 한겨울날 오랜만에 술자리가 있었다. 그 날따라 모임이 늦게 끝났고  나는 새벽 1시쯤 자리를 떴다. 술을 조금 마신 상태로 심야버스를 탔는데 그만 깜빡도 아니고 푹 잠이 들어 버렸다. 한참 자다가 싸한 느낌에 퍼뜩 깨보니 거의 텅 빈 버스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곳. 정신이 번쩍 났다. 어딘지도 모르고 바로 벨을 눌러 버스에서 내렸다. 보아하니 일산을 한참 지나 파주로 가는 시골길. 웬만한 일산 버스 종점 몇 군데는 한 번씩 가본 나였지만 그렇게 인적도 가로등도 없이 깜깜한 곳에 혼자 뚝 떨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파주 교하지구가 입주를 시작하면서 내가 탄 버스 종점이 일산에서 파주로 옮겨 간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쒸, 우쒸’ 하면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버스가 지나온 길을 정신없이 걸었다. 가끔 옆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경보 선수처럼 미친 듯이 30분쯤 걸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경기도 고양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는 표지판. 세상에… 이제 파주를 막 지나왔다니. 집까지는 30분 이상 더 걸어가야 하는 거리. 춥고 힘들었다. 더 이상 걸어가기를 포기하고 집에 전화를 했다. 한참 주무시던 아빠가 새벽 3시 반에 나를 데리러 오셨다. 집으로 오는 내내 계속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도 깨어있었다.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하니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했다. “앞으로는 버스에서 절대 잠들지 마.” 헉. 이제와 통금 시간이라도 생기려나 하고 있었는데, 일찍 들어오라는 것도 아니고 술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버스에서 잠들지 말라니.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혼자 속으로 웃겨 죽을 뻔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 새벽에 딸내미 데리러 나온 아빠도 집에 오는 내내 별 말이 없으셨네.


엄마의 엉뚱함이 드러나는 또 다른 해프닝은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해 초여름에 있었다. 그날도 으레 하던 야근을 마치고 집에 오니 밤 11시가 됐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외할아버지 댁에 가셨고 나는 열쇠를 깜빡한 채로 출근을 했던 것이다. 비상 열쇠도 없었고, 동생도 멀리 살고 있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의 첫마디는 “어머, 우리 꿍꿍이 밥 굶을 텐데 어떡하지? 캄캄한 데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였다. 나보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오직 강아지 밥 걱정만 했을 뿐. 너무 웃겨서 내 걱정은 안 하냐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너는 네가 알아서 하잖아.” 역시 엄마다웠다. 


깔깔대며 전화를 끊고 PC방으로 향했다. 아이 러브스쿨에 접속해서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다가 담배 연기가 심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 시. 이 참에 대화역 근처 러브호텔이라는 데를 가볼까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어디서 자야 하나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세상에, 시골도 아닌 일산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예쁜 밤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꺅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행복해진 나는 천장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기 싫어졌다. 처음으로 집 앞 공원 벤치에 누웠다. 가방에 있던 조간신문을 이불 삼아, 가방을 베개 삼아 밤하늘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평소 퇴근 후에 가던 헬스장에 들러 잠깐 걷고 샤워를 한 뒤 출근하는 걸로 마무리된 이야기. 다음 날에도 엄마 전화나 문자는 없었던 것 같다. 공원 벤치에서 잤다고 내가 신 나서 먼저 전화했을 때 엄마는 “어머, 얘는..” 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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