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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리자고의 자리 Apr 17. 2024

류이치 사카모토를 위한 발문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Ars longa, vita brevis’(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꽤나 진부한 말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거장의 마지막 공연을 담은 영화. ‘류이치사카모토 오퍼스’(이후 오퍼스)의 엔딩 크레딧으로 ‘Ars longa, vita brevis’ 이상의 문구가 더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쉽게 다른 답을 떠올리기 어렵다. 죽음의 세계에는 시제가 없기에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진부할 수 있는 Ars longa, vita brevis 조차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에 진부함이라는 이끼 역시 존재할 수 없는 세계, 그야말로 Ars longa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한 독서모임에서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던 때, 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앞둔 음악가가 자신이 발표했던 곡들 중 스무 곡 정도를 골라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영화’ 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나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상한 말이기도 하다. 어느 음악가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거나,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것과 달리 자신이 평소에도 연주했던 음악을 연주하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것만을 담은 영화 또한 남에게 소개할 만큼 아름다운 영화이기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이치의 연주만으로 구성된 오퍼스가 특별히 아름다운 영화인 것은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 단순한 공연이 아닌, 공연의 형식을 지닌 류이치 사카모토의 죽음이자, 류이치가 지내는 자신의 장례이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어떤 소통도 없이 자신이 평생 연주해온 곡들을 때로는 기쁜 표정으로, 때로는 슬픈는 표정으로 연주하는 류이치를 통해 영화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그의 장례식이었음을,    흑백의 스크린 안에서 살아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더 이상은 산 자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오퍼스는 더 이상 영화일 수 없다. 류이치라는 걸출한 무당이 스크린에 펼쳐놓은, 그가 평생에 걸쳐 도달하고 싶었던 Ars longa의 세계인 것이다.    

 누구나 단 한 번밖에는 사용 할 수 없는 오선지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적어놓고 은근슬쩍 우리를 Ars longa의 세계로 이끌다니, 류이치가 이토록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던가? 언젠가 물어볼 수 있길 바라며 류이치 사카모토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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