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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Oct 30. 2023

다른 생각에 다가가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법적인 판결을 받든 다수의 지지를 받든 

어느 한쪽이 우세한 상황을 맞이하면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곤 합니다.

이긴 쪽은 의기양양하게 상대를 비웃거나 큰소리치기도 합니다.

밀린 쪽은 꼬리를 내리고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길에서 차사고가 나거나 대물 손괴, 혹은 물질적 피해가 일어나면

좋든 싫든 몇 대 몇으로 판결 난 상황을 받아들이고 합의에 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화에서 비롯된 분쟁은 끝날 것 같아도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관은 그 나름대로 이유를 붙이면 모두 그럴싸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의견은 아니더라도 소수의 지지만 받아도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달착륙이 조작되었다고 믿고

인종에 대한 열등성을 믿고, 선거 때마다 조작되었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 모이면 맞는 말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수의견은 모두 문제가 있는 생각일까요?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을 옹호하면 반역자로 여겼습니다.

18세기, 존 뉴튼과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제도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많은 영국인들이 노예제도가 정당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 중에서도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사회는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보편적 다수의 의견 보다

소수의 의견을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납니다.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탄압하는 사회는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인 힘을 얻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은 타락하기 쉽습니다.

제어받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권력 이상의 것을 탐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편적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그 단계에 들어가면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히틀러도, 노예무역 상인들도, 천황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진 군인들도

끝까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과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하게 여겼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생각보다 괴롭습니다.

폭력적인 언어가 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대화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위계에 의해 강압적으로 전달되는 언어는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이 더 나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다름은 불편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리스너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잘못된 의견이라고 윽박지르고 조롱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증오만 심어줍니다.

하지만 겸손한 리스너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공감의 영역을 찾아냅니다.

그뿐 아니라 소수 의견이라도 의미가 있는 생각이라면 세상밖으로 나오도록 이끌어줍니다.


그 일을 해 달라고 우리는 정기적으로 선거를 하고 민의를 반영해 줄 대표를 선출합니다.

문제는 들어야 하는 직업이 귀를 닫아버릴 때 일어납니다.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를 지녔지만 갈등의 원인이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소통의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이제는 누구나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 언론인, 작가, 교수 등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에는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까지도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피커는 늘어가는데 리스너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스피커는 쏟아져 나오는데 듣기 힘든 이야기만 반복되어 재생됩니다.

그 사이 진짜 도움이 필요한 소수의 의견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공간에 잠겨 버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역사는 우리에게 반복되는 법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 갈등, 차별 속에서 가장 큰 피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향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나니 지난해에 있었던 참사나 사고로 생명을 잃었던 이들이 기억에서 멀어져 갑니다.

또 한 해가 지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올 해의 아픈 사건들도 잊어버리겠지요?


맞습니다.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의 원칙은 다수의 이익에 집중되어 있으며

자신의 수고를 어떠한 이익도 없이 남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할 수 있는 건 있습니다.

바로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입 대신 귀를 열어 그동안 잘 듣지 않았던 아주 작은 소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물론 넓은 바다에 맑은 물 한 방울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내가 변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위로와 희망을 얻는다면 내 세상은 변합니다.

아주 잠깐 살다 가는 삶, 나는 세상의 원칙과 다른 삶을 살다 갈 수 있습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삶이 참 어렵고 무섭습니다.

원치 않아도 우리는 세상이 정해둔 갈등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작지만 큰 무기가 있습니다.

두 귀와 넓은 마음만 있으면 갈등을 화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진실한 미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바꾸는 위대한 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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