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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Dec 08. 2024

고정 멤버라는 환상

유한할 때 빛나는 모임

오래 전에 진행했던 독서 모임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시작했다. 낯선 사람 열 명이 모였고 첫날부터 뜨거운 화학적 반응이 일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대화는 쿵과 짝이 척척 맞아 돌아갔고, 우리는 이 멤버 그대로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매주 읽고 온 책으로 토론하자고 했다. 하지만 다들 일주일에 한 번은 부족했는지, 누군가가 저녁 식사 자리, 예쁜 카페, 보드게임방, 영화관으로 급히 만날 사람을 모으면 매 번 절반 이상은 급만남에 참여하곤 했다. 그러면서 멤버들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모임 1주년이 되던 날, 우리는 공간을 빌려 자체 행사도 했는데, 주고받은 선물과 재치있는 문구의 상장도 만들었다. 헤어질 무렵 2주년은 어떻게할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우리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신기하리만큼 1주년을 기점으로 멤버가 하나둘씩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며 모임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끼리'라는 말에 취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창구를 마련하지 못했고, 자연히 남은 사람도 서서히 동력을 잃었다. 그렇게 나의 첫 독서 모임은 사라졌다.






어릴 적부터 나는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같은 반일 때 친하게 지내고, 반이 바뀌면 소원해지고, 학교가 달라지면 연락이 확연하게 줄거나 끊어졌다. 특별히 갈등 같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단지 친구 관계을 맺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그러했다. 이러한 관계 맺기가 문제라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인간 관계를 돌아보니 가깝다고 말한 만한 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독서 모임은 변화의 첫 시도였다.


삼십 대 중반 어느 한 해 동안 활활 타오르고 재만 남은 독서 모임에서 인간 관계를 다시 배웠다. 관계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결국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 좋은 관계도 반복되고 당연시 되면 소중함과 신선함 모두 줄어든다는 것. 특히 같은 멤버들끼리만 깊이 교류하다 보니, 독서 모임에서 나오는 주제에 누가 어떤 말을 할지도 예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은, 인간 관계에서 필요한 거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임으로 맺는 인간 관계에서 몇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될 것.

둘째, 찾아온 사람에게 환대를 할 것.

셋째,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을 것.

넷째, 기약없이 헤어질 것.

다섯째, 그럼에도 다시 찾아와준 사람에겐 또 한 번 환대를 할 것.


늘 그 자리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글쓰기 모임은 내가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함께하고 싶은 누군가가 찾아와주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내가 한 자리에서 발산하는 파동에 공명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들이 곁에 남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다음을 약속하지도 않고 헤어졌으며, 다행히 많은 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이런 다짐을 바탕으로 글쓰기 모임을 시작할 때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항상 기한이 있는 프로젝트성 모임으로 시작한 것이다. 기한이 있는 프로젝트성 모임은 유한한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와 닮아 있다. 존재는 기한이 분명할 때 더 진한 의미를 가지기 마련이니까.


한 달 동안 글을 쓰고 인증하는 모임이라면, 그 한 달이 끝난 후에는 정산하고 쿨하게 헤어진다. 다음 달에도 모임은 개설되지만, 회원들은 다시 참여할 수도 있고, 쉬었다가 돌아올 수도 있다. 모임에서 맺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글쓰기 모임은 8년차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현재는 매달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관계에는 마감이 있다. 우리의 존재가 유한하기 때에 언젠가는 이별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면 관계는 더 깊어진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프로젝트성 모임처럼 마감이 정해진 관계는 함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고, 마감이 없는 관계는 반대로 과도한 기대와 부담을 낳는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관계는 더욱 아름답게 빛나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매 순간이 소중해지는 것처럼. 


지금도 나는 모임의 마감을 즐긴다. 한 달 동안 뜨겁게 글을 쓰고, 함께 노력하며, 헤어질 때는 웃으며 작별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을 다음 달에 또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먼 길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오랜만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영원히 못 만나기도 한다.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 대신,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는 관계. 그때 뜨거웠던 독서 모임에서 배운 관계의 진리 덕분에 나는 좋은 글벗을 곁에 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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