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애가 태어나는데.
휴대폰 메시지가 왔다. 오랜만에 글쓰기 모임 운영진 단체 채팅방이 열렸다. 각자 바쁘게 사는 탓에 갑작스런 메시지는 보통 경조사 때문이다. 반갑게 대화를 나누다 사람들의 소식에 문득, 우리 모임에 회칙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글쓰기 모임에는 회칙이 있다. 그 중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이성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규정이다.
이성문제
1. 이성 회원에게 개인적인 연락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 다른 멤버에게 연락이 꼭 필요할 경우, 운영진에게 말씀해주세요.
3. 원치 않는 연락 및 접근으로 상대 회원분이 불쾌감을 호소하는 경우, 활동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4. 운영진의 철벽에도 불구하고 커플이 되신 분들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항목은 역시 마지막 4번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멤버들이 더 이상 젊지 않으나, (그래서 회칙이 다소 무용해졌지만.) 한때 젊은 미혼 남녀가 주로 모였던 이곳에서 사랑이 싹트는 현상은 자연스러웠다. 다만 글쓰기는 뒷전인 채 여러 이성에게 마구잡이로 찔러보는 사람이 한 명만 생겨도, 모임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곤 했다. 글쓰기와 모임에 정을 붙이려던 사람도 그런 이 때문에 불쾌하다는 민원을 남기고 떠나가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모임 차원에서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했다. 다만 연애를 완전히 금지하는 방향은 아니라서, 연락처만 모임장이 관리하는 방식으로 회칙을 구성했다. 여기에 덧붙여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모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마찬가지로 회원들의 개인 연락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사적인 연락 자제를 권고하는 회칙이 생기자, 그동안 종종 생겼던 이성 문제가 수그들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임 차원에서 구축한 철벽 방어선을 뚫고 커플이 된 이들이 당당히 탄생하곤 했다. 서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결혼 그리고 출산까지 대부분 이어졌다.
글쓰기 모임이 아니었으면, 이 사람이랑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오래 전 일이었다. 그날 H는 갑작스레 나에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일 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글쓰기 모임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뱃속에 아이까지 품은 H였다. 그때는 아직 코로나가 닥치기 한 해 전이었고, 곧 엄마가 될 H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출산이 임박해 한동안 모임에서 보기 어려울 테니, 그전에 얼굴 좀 보자고 나온 자리였다. 그리고 대화는 자연스레 남편과 만난 이야기로 흘렀다. 글쓰기 모임에서 이루어진 둘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H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던 H였다. 삼십 대를 지나며 켜켜이 쌓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벽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운명은 짓궂어서 마음을 완전히 비웠을 때, 생에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H의 남편 역시 글쓰기 모임 회원이었다. 진한 마산 사투리에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을 때면 의외의 느낌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친 남자의 향기를 예상하고 읽어 내려간 글에선 따듯하고 무르익은 감성이 담겨 있었으니까.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H도 남자의 글을 먼저 읽었기에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글은 겉으로 알기 어려운 상대의 내면 깊은 곳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 서로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공유하며 서서히 허물어진 마음의 벽을 남편이 성큼 넘어온 것이다. 그렇게 스쳐갈 뻔한 인연을 글쓰기가 붙들어 부부로 맺어주었다.
글쓰기 모임은 마음의 문턱을 낮춘다. 일기, 수필, 소설, 시. 무엇을 쓰든지 글 안에는 작가의 무언가가 묻어나기 마련이고, 글을 읽은 사람은 작가의 흔적을 느낀다. 나 자신이 투영된 글을 쓰고, 그 글을 함께 읽고, 생각과 마음을 나누다보면, 단 한 번의 모임에도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음 나눔 모델. 그래서 우리는 글쓰기 모임의 코어를 마음 나눔 모델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여러 해를 거치는 동안, 모임 운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코로나라는 시대적 역경에 역경에 대응하면서, 마음 나눔 모델로 시작한 모임은 챌린지 모델, 더 나아가 스터디 모델로 점점 진화했다. 그럼에도 역시 본질은 마음 나눔에 있다. 서로를 독려하는 글쓰기 챌린지에도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존재하고, 글쓰기를 함께 훈련하는 그룹 스터디에도 서로 내면을 들여다봐주는 시간이 존재한다. 글쓰기란 애초에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열린 운영진 단체 채팅방에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한 커플의 둘째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축하가 오가는 중에, H가 수줍게 메시지를 남겼다.
'사실 저도 뱃속에 늦둥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요.'
역시 사랑이 넘치는 글쓰기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