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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ing Surgeon Sep 29. 2020

인생의 흔한 교훈


“OO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6시쯤 수술이 끝나고 방으로 왔다.
저녁 9시, 연구실에서 마지막으로 데이터 백업을 하고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른쪽 주머니 안에 별도로 달린 작은 포켓, 늘 내가 메모리 카드를 넣어두는 곳이다.
어라?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도 메모리 카드가 없다. 왼쪽 주머니에도 가슴 앞 주머니에도...
분명 수술 끝나고 주머니에 넣은 기억이 나는데...하는 순간.
아뿔싸. 가운 주머니가 아니라 수술복 주머니였구나.
평소와 달리 가방을 안 들고 수술실에 들어가느라 수술복 주머니에 메모리 카드를 넣었던 기억이 났다.

부리나케 수술실 갱의실로 달려가 보았으나 수술복을 벗어 놓는 햄퍼(큰 보따리)는 모두 비워져 있었다.
용량이 큰 메모리 카드라 가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자료들을 날려버린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리저리 알아보아 햄퍼를 관리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몇 시쯤 벗어 놓으셨어요?”
“6시쯤이요.”
“음...그럼 이 세 개의 햄퍼들을 한 번 찾아보세요.”
햄퍼 하나에는 대략 100벌 정도의 수술복이 있는 것 같았다.
수술실 간호사의 도움으로 산타할아버지가 썰매에 얹고 다니는 선물 주머니처럼 생긴 큰 보따리를 하나씩 풀기로 했다.


첫 번째 보따리를 열고 구겨진 수술복을 펴서 한 벌 한 벌 주머니에 손을 넣어가며 메모리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메모리 카드라 직접 주머니를 다 뒤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보따리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찾고 수술실 앞 복도에 널브러진 수술복들을 다시 주섬주섬 빈 햄퍼에 담아야 했다.
두 번째 보따리에 희망을 걸고 다시 한 벌 한 벌 꺼내며 찾기 시작했다. 이젠 등골을 따라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아직은 희망이 있어.
새로운 보따리를 열고 나니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정성스레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치기도 하고 허리도 아파서 바닥에 털퍼덕 앉아 수술복들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또다시 두 번째 보따리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를 애써 외면하였다. 좀만더 찾다 보면 나올거야...
수술복은 뒤집어져 있기도 하고 땀에 젖은 듯 축축한 것들도 있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째 보따리의 마지막 수술복.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널브러진 수술복들을 햄퍼에 담았다.

이제 마지막 하나의 햄퍼만 남았다.
두 번째 보따리를 풀 때까지만 해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나는 이젠 큰 기대 없이 세 번째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여기서 접고 훌훌 털고 일어날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간호사가 있기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본다.
더러워진 손으로 얼굴을 만질 수 없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어깨로 겨우 문질러 닦아가며 다시 수술복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벌의 수술복들을 다 꺼내며 보는데....
드디어 햄퍼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두 벌의 수술복.
내가 먼저 한 벌을 집어 올렸다.
양쪽 주머니를 모두 뒤졌으나 아무것도 내 손에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실망. 좌절.
‘그래 새로운 카드 하나 사지 뭐. 여기 담긴 데이터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제 정리나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마지막 한 벌 남은 수술복을 들고 외쳤다.
“대박!!”

“선생님, 이래서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되나 봐요.”

마지막 보따리의 마지막 수술복이라니.
기쁘기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마지막 보따리의 마지막 수술복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요 보따리 먼저 풀어볼걸..하는 후회도 있었지만, 그래도 찾은 것이 어딘가.

햄퍼를 관리하시는 분이 이때쯤 오셔서 수색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으셨다.
마지막 보따리의 마지막 수술복에서 찾았다고 너무 신기하다며 말씀을 드렸더니,

“원래 인생이 그런거에요”
라고 하신다.

아니 오늘 다들 너무 철학적이셔.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라.

등등의 말은 그저 흔한 교훈일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 평범한 교훈 한 가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 보따리의 마지막 수술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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