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를 보고
슬기로운 의사생활 (슬의생) 시즌 2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영한 시즌 2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술 때문에 간경화가 발생하여 간이식을 받았음에도 다시 술을 마시는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드라마에서는 딸들에게 간이식을 두 번이나 받고도 다시 뻔뻔하게 술을 마시는 환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이런 일들이 진료실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외과의사 이익준 (조정석 분)의 대사는 제가 환자들에게 했던 이야기들과 너무 닮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특히 젊은 환자들의 경우 친구들 때문에 다시 술자리에 가게 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럴 때 저 역시 "간이식을 받은 친구에게 술을 권하는 친구는 친구도 아닙니다."라고 냉정하게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충격요법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술을 마시면, 저는 더 이상 환자분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까지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익준도 그렇게 얘기를 하더군요.
술을 마셔서 간이 나빠진 환자에게 간이식을 해 주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간이식 분야의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미국에서는 '6개월 원칙'이라 하여, 이식 전에 6개월 이상 금주 기간을 가지지 못하면 아예 이식 대기자 등록을 해주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간이식 전 금주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여러모로 술에 관대한 사회이지요. 술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간 기능에 여유가 있는 경우라면, 당연히 금주를 유도하고 간이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기간부전에 이르러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곧 사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오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6개월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간성뇌증으로 의식이 혼탁해져서 응급실로 내원하는 경우에는 금주고 뭐고 당장 촌각을 다투어 이식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대부분 뇌사자로부터 간이식을 받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가족들의 기증으로 이루어지는 생체 간이식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조금은 다른 기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한정된 뇌사 장기 기증자의 간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간이식을 받는 수혜자들에 대한 선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간이식 후 장기 생존을 기대할 수 있고,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이 소중한 간을 배분하자는 것입니다. 환자가 심장 질환이나 심각한 감염 등 다른 질병이 동반되어 있어 간이식 수술을 받더라도 생존을 기대하기 어렵거나, 다시 술을 마셔 금세 이식받은 간을 망가뜨리면 안 되겠지요. 술로 간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부족한 간을 나누어주면, B형 간염이나 C형 간염처럼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며 뇌사자 간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뇌사 기증자의 간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환자를 직접 보는 외과의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무 자르듯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당장 눈앞의 환자는 죽어가는데, 술을 마셨기 때문에 간이식을 해 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가족 가운데 생체 기증자를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에는 이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뇌사 기증자의 간과 달리 생체 기증자의 간은 국가에서 관리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에게만 지정하여 기증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번의 기회는 주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셨든 그렇지 않든 간이식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올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으니, 또 당장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으니, 최대한 설명을 하고 간이식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술로 간을 망가뜨렸지만, 이후의 삶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간이식을 받은 후 다시 술을 마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미 한 번 충분한 교훈을 받았음에도 또다시 술로 돌아가 간을 망가뜨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러다가 다시 간이식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간이식을 해주기 어렵습니다. 슬의생에서는 두 번의 간이식 기회를 받은 환자가 나오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해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막상 또 다른 생체 기증자가 가족 중에 나온다면 또 고민을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알코올성 간경화로 간이식을 받는 환자들에게, 수술에 앞서 반드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회복시키고자 간이식을 하겠지만, 이후 다시 음주를 하여 간이식을 받을 상황이 온다면 저는 두 번째 간이식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얼마 전, 간이식을 받고 잘 회복하였으나 다시 음주를 시작하여 결국 간이식 후 6년 만에 간부전으로 돌아가신 환자분이 계십니다. 처음 간이식을 받을 때는 가족들이 열심히 도움을 주었으나, 다시 간경화가 발생하니 친정어머니 말고는 가족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런 환자들을 볼 때면, 마음이 늘 씁쓸합니다.
오늘 저녁은 술이나 한 잔 해야겠습니다.
[사진출처: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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