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림, 伯林. 베를린을 한자를 이용해 외국어 음을 표현한 말. ‘베를린’이라는 발음 보다 백림으로 불렸었을 그때를 생각한다. 독일인의 발음, 베를린 보다 하얀 대나무의 숲, 백림이라는 말이 더욱 익숙했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고향의 말처럼 느껴졌을 그 시절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우리보다 더 일찍이 독일의 역사를 증명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백석의 시를 읊고 싶어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타샤는 흰 겨울밤 멀리멀리 갔겠지. 이내 나타샤 뒤를 따라 백림에 터전을 잡은 여자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오래전, 고국을 멀리 뒤에 두고 백림의 나라, 독일로 온 사람들이 있다. 백석의 나타샤를 닮은 수많은 여성들은 여기, 독일의 낯선 흰 대나무의 숲 속에 뿌리를 내렸다.
떠나온 사람들은 그림자가 길다. 겨울이 식어가며 해가 유난히 길어지면, 땅이 데워지는 시간도 길어진다. 태양은 오랫동안 데워지고 뜨거워지는 지표면을 찾아 고도를 더 높인다. 땅이 계속해서 뜨거워질수록 사람들은 긴장해야 한다. 기온이 높아지면 흐르는 땀이 많아지니까. 삶은 계속해서 더워지고 피곤해진다.
누군가의 처음의 청춘도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다. 점점 더 피로한 육체는 피할 곳이 없다. 그래서 조금씩 발걸음이 늦어지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림자가 긴 사람들은 백석의 시처럼 눈은 푹푹 내려도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또 아름다웠던 자신만의 장소를 기억한다. 그리고 현재를 살기 위해 오늘밤이 좋다고 말할 줄 안다. 그들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밑동을 드러내 훤히 보이는 고목의 나이테처럼 뚜렷한 세월의 증거가 있다. 거칠지만 단호하다. 나는 이런 손가락으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그러니까 나보다 일찍이 나타샤가 된 사람들이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인근 도시에서 6년째 살고 있다. 나는 그동안, 독일 곳곳에서 나보다 훨씬 먼저 떠나온 여성들을 봤다. 꽤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라서 그럴까, 한인 마트에서도, 한국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강인해 보였다. 주름은 많고 깊었지만 빛나면서 웃고 있었다. 나보다 일찍이 나타샤가 된 사람들의 어깨와 허리는 가끔 독일인처럼 보였고 손마디는 강인했으며, 꼿꼿하게 서서 걸었다. 그리고 등 너머의 긴 그림자는 자기만의 애환을 담고 있었다.
백림으로 부르던 도시로 다양하고 엇비슷한 이유로 건너온 여성들은 그림자가 나보다 길었다. 나보다 훨씬 손가락 마디마디가 강해 보였고, 어깨는 조금 굽어 보였으나 보폭을 크게 하여 걸어서 건장해 보였으며 말투 역시 아주 당당했다. 나는 궁금해졌다. 긴 그림자 속에 흐릿해져도 이미 너무 흐릿해졌을 세월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림자를 이끌며 강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파독 교포 혹은 재독 1세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작년, 이들을 위해 글쓰기 강의를 한 일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긴 그림자를 가졌다. 땅이 조금 식고, 태양의 기울기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삶을 언어로 풀어내는 데 조금 더 유연한 방법만 안다면 문장이 뿜는 희로애락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
글쓰기를 할 때, ‘삶 속에서 주제를 찾는 법’을 젊은이들은 자주 어려워한다. 그래서 글쓰기 강의에서는 이를 강조하는데 그분들과 이야기할 때는 조금 달랐다. 글의 주제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삶에 녹아진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넘치게 쏟아지는 말들이 가득했다. 마치 오래전 겨울날, 떠나온 고향집에서 작은 화로를 앞에 두고 고구마를 구 앳된 아이들의 수다처럼. 소학교 시절 단발머리 모습으로 손을 들고 한껏 상기된 얼굴로 나만의 이야기를 하는 꿈 많은 앳된 소녀들처럼. 현재의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아주 오래된 시간의 풍경에서 출발하는 기억의 모음들이다.
이들에게는 이름 붙이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막 독일에 와서 힘들었던 경험, 남편과의 사별, 아이와 함께 지나가다 이유 없이 인종차별을 받았던 과거의 기억들, 병과 싸웠던 고단했던 상황처럼 상대가 숙연해지는 명도가 진한 이야기였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라 맞춤법이 틀린 것도 많고, 화려하고 수려한 문장의 표현은 서툴지만, 글의 중심은 튼튼했다. 삶 자체가 글이었다.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삶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해요.”라고 늘 말하던 내가 겸허해지는 순간이었다.
긴 그림자를 끌고 힘차게 걸어온, 독일에 뿌리내린 한인 여성들의 걸음 위로 흐르는 삶이 아름답다. 그들보다 젊은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아직 걷는 중이다. 그래서 그들보다 그림자가 아직 짧다. 하지만 나도 아름답게 길어질 것이다. 그림자가 길어질 만큼 손마디는 강해지고 삶의 이야기는 더욱 쌓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일에는 수많은 나타샤가 겨울밤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올 것이고, 분명 그들은 아름다울 것이다. 아름다워서, 아름답게 뚜벅뚜벅 삶을 걷겠지. 그리고 삶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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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세계여성네트워크 문집에 발표한 수필을 조금 다듬어 브런치에 올립니다.
- 사진은 언스플레쉬 무료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