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더 학습할 환경을 만들어줄까 생각하고 생각해서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주는 엄마가 되기를 바라. 공부하고 나서 책상 위도 항상 깨끗이 정리하도록 얘기해 주고.
(윽박지르는 거 아니 아니!)
되도록 작은 서랍이 있는 가구를 놓아줘서 책상 위가 너저분하지 않게 정리해야 한다는 걸 말해주고 말이지.
네 잔소리는 글에다 쓰고
네 걱정은 기도에다 무겁게 올리고
네가 느낀 어떤 기쁨이나 칭찬은 아이들이 듣도록 말로 전달하고.
이런 방식의 삶이 서로를 건강하게 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메모장을 정리하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작년쯤 딸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고 지우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학습과 성장을 위해 고민고민하는 그 애에게 이렇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었나 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메모는 딸에게 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내가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때 당시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고 자책하며과부하에 걸려힘들어하는 딸을 보고 걱정하던 참이었다.
속으로는 냅다 '네가 문제라고!' 하며 튀어 오르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애에게 내 걱정과 진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문장이 지금 나를 향하고 있다.
내가 딸에게 보낸 문장이지만 서슬 퍼렇게 살아서 정작 나는 이 말대로 살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말이란 그 사람의 생각이고 바람이고 소망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의 줄기를 따라가려는 어떤 노력이나 분투도 하지 않은 채 말만 늘어놓는다면 그 말에 힘이 있을까? 진심이 실릴까?
아니면 그 말을 살지 않는 사람의 말이 정말 말로써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싶다.
작년에 육아와 일,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 애는 부단히 다음 스텝과 다음 계단을 잘 넘어온 모습이다.
아이들이 커가는 속도와 비슷하게 스스로 조금씩 성장하고 건강한 엄마의 모습으로 완성되어가고 있다. 어렵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고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보다 낫네, 하게 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지만, 손자들과 영상과 문자로 대화하고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들과 함께 가고 있다. 마음이 답답한 어떤 날은 훌쩍 부산으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나를 달랜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건 서로에게 선을 넘는 가족이라는 밀착된 속성에서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된다.
어쨌거나 나도 삶의 경중을 정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건강한 방향일지 고민하게 되니까.
나와 나 사이에도 간격이 있듯, 우리 사이에 있는 간격을 인정하며 살기를 원한다. 그 떨어져 있는 간격은 나를 돌아볼 수 있고 너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완충지대.
-서태옥[인생의 정오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중에서
매일매일 마음 안에 떠오르는 내면의 갈등은 이 간격을 유지하기 위한 연습이다.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같이 말이다.
때로 내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픈 건 이 간격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친 엊그제, 하늘이 화창하다 못해 눈부시다. 고개를 꺾어 바라보는 내 시선 끝에 마침표 같은 감동이 터진다.
어쩜 저리 아름다운 균형일까?
수제비를 뚝뚝 떼어 풀어놓은 구름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구름과 구름의 유영이 완벽한 건 하늘을 수놓는 그들의 간격, 구도를 이루는 적당한 거리감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