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탈근대 뭐라고 부르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진리라는 허상을 좇지 않아. 현실을 살아가기 바쁘지. 고대에는 이데아라고 불렸고, 중세에는 신이라고 불렸고, 근대에는 이성이라고 불렸던 그 진리.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더 이상 주인을 찾지 못한 대진리의 자리는 공중분해 되어가고 있어. 개별 인간이 가진 각각의 소진리만이 존재하고 있고. 진리, 기준, 도덕, 옳고 그름을 비롯한 많은 크고 단단한 가치들이 설자리를 잃고 무너져 내리고 개별적이고 유연한 가치만이 살아남고 있는 현실이지.'
염세적이고 허무한 근대적 인간들을 너무나도 가깝게 두어온 탓에 나는 꽤 오래전부터 내가 낭만과 직관 추종자임을 깨달았다. 심지어는 직업 선택의 과정도 그러했다. 그저 언제나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길을 택했고 항상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늘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직관적 선택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킨다. 선택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어느 순간 재미보다는 차선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창업 마무리 단계에서 VC 제의를 받았을 때,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통상적인 면접 용 Why VC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건지 필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직업에 기대했던 수준 이상으로 크게 만족하고 있다. 조건이나 안정성이나 상방 가능성 같은 재미없는 이유는 아니다. 그런 게 중요했다면 나는 늘 감사하게도 나보다 뛰어난 주변인들에게 툴툴거리기나 하는 불행아가 되었을 것이다. 앞서 친구가 던져준 영감에 시작해서 지금 나에게 Why VC는 이성적으로 정합하고 마음에는 충만하여, 명문화를 거쳐 공유해도 무방할 정도여서 몇 자 적어본다.나심 탈레브 보다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고 레이달리오의 원칙 대신 노르웨이의 숲이 인생 서적 중 하나인 1년차 VC의 생각이니 가볍게만 읽어봐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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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탈근대 뭐라고 부르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진리라는 허상을 좇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기 바쁘다. 대진리는 공중분해 되었고 철학가는 설자리를 잃었지만 세상은 그 깊고 본절적인 사고는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선형적으로 나아간다. 발전한다. 그 속에서 개별 인간은 각각의 소진리를 가지고 아우성친다. 기가 차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견인하는 개념과 주체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의 그것은 창업가와 엔지니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치이다. 기술이 곧 진리라는 애당초 흄 선에서 정리되었던 주장을 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저 현상으로서 보는 것. 21세기 전반을 감히 관찰자 적으로 관조했을 때 혁명이라던가 그에 준하는 파급력, 유의미한 인간 행동의 동질적 변화, 파생되는 부가가치, 이후의 국가적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그 모든 것이 기업과 기술이라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현대라고 불리기 어려운 시점이 오면 지금을 어떻게 부르게 될지 미리 생각이나 해보자. 이 정도 속도라면 산업혁명에 더 이상 n차를 붙이기도 빠듯해보이니 말이다.
이러한 환경의 조성에는 자본이 있다. 전후관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만 창업 초기단계의 생태계 변화를 보면 두드러진다. 극소수의 용감한 언더독의 전유물이었던 창업은 몇 년 사이 탁월한 엘리트들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그 동기는 부자 순위를 보면 당연하게 납득할 수 있다. 닷컴버블 이후 벤처산업 암흑기 시절 대한민국 부자 순위는 재벌 3세들이 모두 메웠다. 하지만 2021년 기준 부자순위에 발생한 지각변동은 흥미롭다. 벤처기업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들이 20위권 내에 절반 이상 포진했다.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마련된 경제적 자유의 가시적인 가능성, 이보다 강력한 동기는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리고 동기를 실행으로 이끌어 낸 것은 VC의 자본 운용이다.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던 젊은 엘리트에게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세계를 보여주고 참여시킨다. 자금과 선례, 정보와 정도를 제공함으로써 말이다.
뛰어난 개개인에게 세상의 변화를 주도할 기회가 자유로이 주어졌던 시대는 없었다. 어쩌면 이를 가능케 만들고 있는 업이다.
선배들이 잘 마련해놓은 환경의 최고점에 이제야 참가하여 거시경제의 어려움에 허덕이고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메커니즘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의 주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판단이 내 이성 체계에서 명확해진 것은 꽤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이를테면 사명감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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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제는 다르고 감정에는 이성의 여집합이 존재한다.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 일이 즐거운가.'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러하다. 물론 순수한 즐거움의 상태보다는 일종의 다이나믹이 맞겠다만, 어쨌든 나는 업을 행하는 현재진행 과정에서 감정적인 충족을 느낀다.
일반적인 수준을 현저하게 뛰어넘는 탁월한 창업가를 만날 때 특히 그러하다. 이때 탁월함은 단순 아카데믹의 영역이 아니다. 정량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탁월한 창업가에 대해 많은 VC들은 '존경'의 표현을 쓴다. 저희는 모든 창업가를 존경합니다. 좋은 말이지만 나는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 든다. 능력에 대한 존경, 낭만에 대한 동화, 그가 주장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의구심, 괜한 반발심, 내가 걷지 못하는 길에 대한 동경, 열등감, 굳이 가지 않을 길을 택하는 그에대한 측은함과 애정. 한번씩은 너무 마음이 달아서 애타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지극히 무던한 편에 가까운만큼 이렇게나 폭넓고 요동치는 감정의 경험의 제공받는 것은 충분한 행운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의 감정으로 공명할 수 있는 대표와 파트너가 되는 것이 나의 업에 대한 제1목표가 되리라. 그러기 위해 역시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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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건 내 인식체계에서 Why VC를 납득하는 것과 내가 좋은 혹은 뛰어난 심사역이 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라는 점이다. 테크도 파이낸스도 제대로 배운 적 없이 스몰엑싯과 메타인지라는 무기만으로 경영학도와 공학도 사이에서 내년에도 열심히 살아남겠지. 그래도 나는 사고하길 좋아하고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니 괜찮다. 무엇이 좋은 혹은 뛰어난 심사역인지 스스로에게 명확해지면 그것을 달성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테니 말이다.